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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 한줄금, 꼬리를 감춘 뒤였네
대문을 열자 잡풀 우거진 마당가
반쯤 들려 있는 돌쩌귀
은빛 거미줄에 싸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온통 물에 젖은 채
사랑채 토광 속에는 묵은 살림들
건넌방 툇마루 위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오랜 세월들
놋주발이며 양재기며 종이 그릇 따위
눅눅히 몸을 비틀며 누워 있었네
이끼 낀 뒤꼍 장독대 위, 깨진 항아리 속에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져
잔뜩 찡그린 채 뭉개져 있거늘
무엇 향해 안부를 물을 것인가
들큼하게 메주가 익던 끝방
나지막한 시렁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네
우물가에는 두충나무 잎사귀들
이제는 아무도 약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
퀴퀴한 냄새를 끌어안은 채
뭉텅뭉텅, 떨어져 썩고 있었네
텅 빈 외양간의 누렁이 따위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네 사람의 훈기가 있어야
탱자나무 울타리도 하얗게 꽃 피우는 것 아닌가
조상님들의 잿빛 얼굴만
집 안 구석구석, 먹구름으로 일고 있었네.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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