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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봉 - 옛집
    시(詩)/이은봉 2019. 11. 14. 19:34

     

    여우비 한줄금, 꼬리를 감춘 뒤였네

    대문을 열자 잡풀 우거진 마당가

    반쯤 들려 있는 돌쩌귀

    은빛 거미줄에 싸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온통 물에 젖은 채

    사랑채 토광 속에는 묵은 살림들

    건넌방 툇마루 위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오랜 세월들

    놋주발이며 양재기며 종이 그릇 따위

    눅눅히 몸을 비틀며 누워 있었네

    이끼 낀 뒤꼍 장독대 위, 깨진 항아리 속에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져

    잔뜩 찡그린 채 뭉개져 있거늘

    무엇 향해 안부를 물을 것인가

    들큼하게 메주가 익던 끝방

    나지막한 시렁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네

    우물가에는 두충나무 잎사귀들

    이제는 아무도 약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

    퀴퀴한 냄새를 끌어안은 채

    뭉텅뭉텅, 떨어져 썩고 있었네

    텅 빈 외양간의 누렁이 따위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네 사람의 훈기가 있어야

    탱자나무 울타리도 하얗게 꽃 피우는 것 아닌가

    조상님들의 잿빛 얼굴만

    집 안 구석구석, 먹구름으로 일고 있었네.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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