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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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청명전야 (淸明前夜)시(詩)/이은봉 2016. 5. 3. 22:47
머릿속 지푸라기로 가득 차오른다 밥 짓기 싫어 라면 끓여 저녁 끼니 때운다 라면에는 신김치가 제격이다 생수병 들어 꿀꺽꿀꺽 물 마신 뒤 소매깃 집어 쓰윽, 입 닦는다 담배 한 대 피워 문 채 베란다로 나간다 멍한 마음으로 아래 쪽 화단 내려다본다 샛노랗게 지저귀고 있는 개나리꽃들 사이 철늦은 매화 몇 송이 뽀얗게 벙글고 있다 저것들은 좋겠다 외롭지 않겠다 쉰의 나이를 넘기고서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무언가 크고 높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로 가득 찬 머릿속 디룩디룩 굴려본다 사랑은 본래 차고 시고 아리게 크는 법. 청명(淸明) : 24절기의 하나. 춘분과 곡우 사이에 들며, 음력 3월, 양력 4월 5일경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15°에 있을 때이다. 이날은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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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싸락눈, 대성다방시(詩)/이은봉 2016. 1. 8. 22:53
싸랑싸랑 싸락눈 내려 쌓이던 겨울 털모자도 가죽장갑도 없었지 양 볼엔 차가운 솜털만 보숭거렸지 스물한 살 곤색 점퍼 위로 나뒹굴던 싸락눈만으로도 가슴엔 쩍쩍 금이 갔지 붉게 아팠지 아픈 마음으로 역전 대성다방 수직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멈칫멈칫 미닫이문 열고 들어서면 톱밥난로 푸스스 타오르던 한 쪽 구석 하얀 손들 번쩍, 올려지곤 했지 옆구리엔 비닐커버의 노트 한 권씩 끼어 있었지 두툼한 노트 속엔 토닥거리다 만 화장기 가득한 서정들……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내일이며 역사를 마구 지껄여 대다가 더런 노트를 바꿔 읽으며 침을 튀기기도 했지 조국이니 민중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가슴을 쳤고 급기야 반유신의 불화살로 날아가고 싶어 몸살이 나기도 했지 다방의 문을 닫는 통금이 가까운 밤, 역전 통으로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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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만점 남편시(詩)/이은봉 2015. 6. 5. 23:39
안 취하려 안 취하려 하다가 사람들 너무 좋아 그만 고주망태기로 돌아와 누운 밤 오늘도 어김없이 아내는 바가지를 긁는다 당신, 이럴 줄 몰랐어요 정말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이렇게 한심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저 혼자 실컷 왜장 치다가 저 혼자 실컷 핏대 올리다가 저 혼자 실컷 신경질 내다가 이것만 지키면 만점 남편이라며 아내는 순식간에 몇 항목 종이에 쓴다 쓰고 큰 소리로 읽는다 - 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것 - 이, 술 마시지 말고 빨리 귀가할 것 - 삼, 제 물건은 제 자리에 - 책, 담배, 양말 등 - 사, 하루 삼십 분 가족들과 대화할 것 - 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목욕할 것 하고, 목청 높여 읽다 말고 아이고, 답답한 이 남편네야 아이고, 폭폭한 이 서방네야 아이고, 철없는 이 신랑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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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섬진강시(詩)/이은봉 2015. 2. 28. 10:20
누가 일러 강이라 했나 골짜기를 적시며 출렁출렁 걸어가는 초록빛 물길 발목 걷고 휘적휘적 걷다보면 산언덕마다 이슬 젖은 수유꽃 내음 꿀벌들 잉잉대는 매화꽃 내음 여울목에 몸 섞으며 하얗게 반짝이고 있지 ( 더런 노랑부리할미새들 부는 봄바람에 쫓겨 둥글게 원 그리며 날기도 하지 ) 발목 부어 잠시 주저앉는 물길 물길은 강으로 불려지기보단 지친 제 몸 감추며 그냥 이렇게 주저 앉아 쉬는 것이 좋지 눈 들어 세상 바라보면 마을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람들 슬픈 이야기..... 물길은 너무 아파 싫지 오래도록 눈 딱 감고 내내 별꽃처럼 풋풋한 서정이고 싶지 만개한 산벚꽃으로 흐드러지고 싶지. (그림 : 유경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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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당진 가는 길시(詩)/이은봉 2015. 2. 2. 00:03
청양 지나 당진 가는 길 송이눈 점점이 떨어져 내리고 떨어져 하얗게 쌓이고 비봉 면사무소 근처 뒤돌아보며 걸음 멈추면 페인트 글씨로 굵게 쓴 용다방,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잠시 머뭇거리다 거기 미닫이문 아무렇게나 삐거덕 열고 들어서면 톱밥난로 아직 붉고 포동포동 살찐 이 다방 미스 정 입술 붉고 그러면 당신은 이 다방 미스 정과 마주 앉아 후룩후룩 쌍화차라도 한잔 마셔야 한다 언 손 녹이며 쌍화차라도 한잔 마셔야 당신 가슴의 슬픔 가라앉으리라 뒤돌아보면 참으로 아득한 길 아득히 달려온 길 가슴 떨리리라 문득 그대 아픈 세월 뚫고 송이눈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날 떨어져 하얗게 쌓이는 날. (그림 : 한순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