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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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호박넝쿨을 보며시(詩)/이은봉 2017. 7. 5. 20:53
두엄 구뎅이 뚫고 호박넝쿨 몇 순 담벼락 타고 오른다 가쁜 줄타기 한다 오뉴월 마른 가뭄 뚫고 따가운 햇볕 뚫고 소낙비에 흠씬 몸 적시며 마침내 담벼락 꼭대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내려다 보는 호박넝쿨들 장하구나 노랗게 피워 올리는 호박꽃들 뽀얗게 드러내놓는 젖통들 굉장하구나 젖은 몸 털며 발 아래 시원히 굽어보면 호박넝쿨들 시원하구나 와락, 현기증 밀려오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여기 담벼락 아래 두엄더미 아래 땅으로만 손 뻗으며 납작 몸 젖히는 놈들도 있구나 아프게 몸 비트는 놈들도 있구나 놈들이 피워 올리는 꽃들 참하게 꺼내어놓는 젖통들, 이라고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환하게 빛나지 않으랴 (그림 : 우용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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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호박등을 켜는 여자시(詩)/이은봉 2017. 7. 5. 20:47
- 오규원 운(韻) 제 가슴에 장밋빛 커다란 브로치를 다는 여자 마침내 그 브로치의 금속 핀에 찔려 죽은 여자 제 가슴에 진달래빛 붉은 알전구를 켜는 여자 마침내 그 알전구의 불빛에 타 죽은 여자 그 여자를 얘기하는 여자 그 여자, 어떤 한 여자 있지 네 속에 있지 그 여자 버들잎처럼 마음 절룩이는 여자 그 마음으로 제 마음 많이 태우는 여자 그 사랑으로 제 사랑 크게 아파하는 여자 제 앞이마에 은빛 자그만 머리핀을 꽂는 여자 제 앞가슴에 달빛 따스한 호박등을 켜는 여자. (그림 : 정종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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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시(詩)/이은봉 2017. 4. 26. 23:27
맵디매운 두부두루치기 백반을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파는 헐값의 검정 비닐구두 잘도 어울리던, 반주로 마신 몇 잔의 소주에도 쉽게 취하던, 마침내 암소를 끌고 가 썩은 사과를 바꿔 와도 좋다던, 맨몸으로도 좋다던 여자가 있었다. 한때는 자랑스럽게 고문진보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여자,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 장독대 같은 여자 두부두루치기 같은 여자 맵고 짠 여자 가 있었다 어쩌다 내 품에 안기면 푸드득 잠들던 여자가 있었다. 신살구를 잘도 먹어치우던, 지금은 된장찌개 곧잘 끓이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 (그림 : 박화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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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봄바람, 은여우시(詩)/이은봉 2016. 6. 26. 22:08
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겉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재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그림 : 홍인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