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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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도시의 불빛시(詩)/황인숙 2014. 7. 25. 10:49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 슬프든 노엽든 따뜻한 핏톨처럼 집집의 불빛들이 밤의 언덕, 골짜기에 고요히 웅얼거리며 맥박 친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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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시(詩)/황인숙 2014. 1. 3. 22:37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서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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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하늘꽃시(詩)/황인숙 2013. 12. 22. 00:49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림 : 한순애 화백) 단비 - 눈꽃송E (St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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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시(詩)/황인숙 2013. 12. 22. 00:48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생(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