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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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낙월도시(詩)/김선태 2018. 6. 9. 09:08
이름만으로도 달빛 부서지는 문장이다 간결한 구도의 수묵화 한 폭이 그대로 펼쳐지지 낙월(落月), 하는 순간 마음속으로 달이 뜨고 져서 그리움 하나로 무장한 채 못 견디게 가 닿고 싶은 섬 밤이면 서쪽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달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싶었네 방파제로 달을 끌어와 앉히고선 밤새 젖은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지 새벽이면 물에 빠져 죽은 달을 건져 황홀한 장례를 치루고도 싶었어 초승달 닮은 새우들이 은빛 물비늘 편지를 쓰는 세상 모든 달들의 무덤 낙월도 낙월도(落月島) :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 상낙월리 달이 지는 쪽에 있다하여 진달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낙월도가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무시이군의 고록차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염해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임치현에 속했으며 진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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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내 속에 파란만장시(詩)/김선태 2017. 12. 18. 23:31
내 속에 파란만장의 바다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썰물이 지네. 썰물이 지면 바다는 마음 밖으로 달아나 질펀한 폐허의 갯벌 적나라하네 상처가 게들처럼 분주히 그 위를 기어다니네 찍힌 발자국들 낙인처럼 무수하네 소나기 내리면 갯벌이 제 검은 살점을 잘게 뜯어내며 오열하는 것을 보네. 밀물은 만(灣)처럼 깊숙이 파인 가슴속을 철벅이며 오네 잘 삭은 위로처럼 부드럽게 갯벌을 이불 덮네 그러나 내 속에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 만조가 목까지 차올라 울렁, 울렁거릴 때 별안간 무서운 해일이 일어 마음의 해안선 전체가 넘치도록 아프네. 내 속에 파란만장의 바다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물이 드네 (그림 : 홍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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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길의 외출시(詩)/김선태 2017. 7. 28. 10:44
보름달밤이면 길은 환하게 마을 나섭니다. 어떤 길은 휘청휘청 산을 오르다 중턱에 앉아 쉽니다. 어떤 길은 느릿느릿 들판을 헤매다 다른 길과 얼크러져 밀밭으로 숨습니다. 어떤 길은 바다 위를 걷고 싶어 방파제 끝에 우두커니 앉아 있습니다. 어떤 길은 계곡 속으로 깊이 사라져 감감무소식입니다. 어떤 길은 술에 취해 비틀비틀 산길을 내려오다 평지에서 그만 나자빠집니다. 그러나 모두들 소복한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새벽녘에야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초췌합니다. (그림 : 이동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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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홍어시(詩)/김선태 2017. 1. 25. 10:48
해는 저물고 눈은 퍼붓는데 친구야, 우리 선창 뒷골목 홍어 먹으러 가자 현란한 불빛, 질주하는 차들의 거리를 지나 삶의 비린내 진창으로 풍기는 곳 홍어 먹으러 가자 그곳은, 산전수전의 늙은 내외가 변함없이 홍어를 써는 곳 잘 삭은 홍어에 묵은 김치와 막걸리가 어우러진 곳 세상 풍파를 주름지게 만난 손이 아름다운 손이야 오래 삭힌 음식이 깊은 맛과 향을 지니는 법이야 사람도 그렇고 시도 그렇지 아니하냐는 늙은 주인 골코름한 말씀에, 세월이 흐르면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된다지요 사람의 소리도 곰삭으면 그늘을 친다지요 오호라 세상만사, 그렇지 아니하냐며 시절가 한 대목으로 화답하다 보면, 얼씨구나 우리는 홍어 속살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알싸한 감동으로 코끝이 시큰하거나 절씨구나 사는 일 아름다워 눈물마저도 찔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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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쪽빛 편지시(詩)/김선태 2016. 8. 31. 10:30
남녘 가을바다는 한 폭의 쪽빛 비단 같다 소슬한 바람이 비단 폭을 펄럭일 때 찬란한 햇빛이 자디잔 글씨로 쪽빛 가을 편지를 쓴다 우윳빛 봄바다와 뻘물투성이 여름바다를 거쳐 쪽빛 투명한 피부로 빛나는 남녘 가을바다 거기 이미 생의 반환점을 돌아온 사내 하나 있어 종일토록 바닷가에 앉아 쪽빛 편지를 읽어내리면 지난 사연들이 모두가 쪽빛으로 되살아나겠다 저물 무렵 남녘의 가을바다는 쪽빛 비단을 거둔다 노을이 쪽빛 편지를 불태우며 떨어진다 내일은 가을바다의 쪽빛이 더욱 짙어지겠다 (그림 : 박현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