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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땅끝에서의 일박(一泊)시(詩)/김선태 2014. 5. 14. 17:01
1.
삶이 거추장스럽게 껴입은 옷과 같을 때
내 서른 몇 살의 온갖 절망 데리고 땅끝에 와서
병든 가슴처럼 참담하게 떨리는 바다를 본다
활처럼 휘어 구부정한 마을 입구를 돌아
사자봉 꼭대기를 헉헉 기어올라서면
막막하여라, 파도만 어둡게 부서지고 있을뿐
군데군데 떠 있는 섬같은 희망도
오늘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질 않는구나
넘어지고 다치며 불편하게 끌고 온 젊음
어디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어디에서 깨끗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2.
막차를 놓쳐버린 적막한 어촌의 밤
주막거리 뒷 켠에 누워 밤파도소릴 듣는다
왜 살아야 하냐고
더럽게 구겨진 누더기같은 삶을
얼마나 더 살아야만 하냐고
파도는 밤새 방파제를 치며 울부짖었지만
그러나 보아라,
여기 스무 몇 가구의 집들이 야윈 어깨를 포개고
그래도 고즈너기 잠들지 않았느냐, 저기
가파른 낭떠러지 바위들도 어둠 속
무릎 세우고 의연히 서 있질 않느냐
3.
편지를 쓰리라
두고 온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리라
막차는 떠났어도 돌아가야 할 내일을 남겨놓은
땅끝에서의 일박
밤이 깊을수록 더욱 거칠어지는 파도소릴 들으며
아직 나는 살고 싶노라고
새벽토록 길고 긴 편지를 쓰리라
하여, 어느덧 내 잠든 꿈 속으로 밀려들어온 바다
그 만경창파 속살을 헤치고 마침내
나는 푸른 섬 하나로 눈부시게 떠오르리라(그림 : 안영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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