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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지나온 청춘에 바치는 송가 6시(詩)/송경동 2020. 9. 19. 18:57
- 영등포역 연가
고향이 전남 벌교에
터 잡은 곳이 구로동이다 보니
수없이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맨 처음은 스무 살이었다
가방이 없어 종이 백 세 개에
잔뜩 옷가지가 담겨 있었다
스물셋 두 번째 상경 땐
큰 가방 하나에 작은 가방 두 개였다
십여 년이 흘러 다시 내릴 땐
한 여인과 갓 돌 지난
조그만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창피하다고 젊어서는 안 들고 가겠다 했지만
체면보다 생활이 먼저임을 깨달아갈 무렵엔
조기거나 양태거나 떡이 꽁꽁 얼려 있는
상자 두어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왔다 어떤 땐 잎 지는 가을이었고
어떤 땐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바람 불던 날
비 오던 날도 많았다
다시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이 악물던 날도 많았고
어떻게든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다시 발을 떼던 때도 많았다
아이도 다 크고
이제 내 곁엔 다시 아무도 없다
이 계단을 몇 번만 더 오르내리면
그것으로 그만일 수도 있다
거기 이십여 년째 줄 지어 잠들거나
소주병을 까고 있는 노숙인들이 남 같지 않다
그 틈 어디엔가
불쑥 끼어들어 눕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돌이킬 수 없지만
사는 것 그게 꼭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다시 영등포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한 소년이 한 청년이 한 사내가
한 노인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그들에게
부디 충만한 사랑과 행복만이 함께하기를(그림 : 김봉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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