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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경동 - 화폐
    시(詩)/송경동 2020. 9. 19. 19:15

     

     

    오늘부터 내 돈은 저 나뭇잎새들

    노란 은행나뭇잎은 만 원짜리라 하고

    빨간 단풍잎들은 5천원권

    아직 여름의 퍼런 멍이 남아 있는 것들은

    천원권이라고 하자

     

    생각하니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고

    가장 윤이 나는 종이에 ‘돈’을 찍는 마음을 알 것도 같고

    세상의 모든 화폐가 정작 스스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온갖 진귀한 것들을 사고 파는 일에 쓰이는 일을 알 것도 같고

     

    모든 빛나는 것들을 온몸에 치렁치렁

    매달고 싶어하는 사람들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떨어져 가을 포도 위를 뒹구는 단풍잎들처럼

    잠깐의 생을 스스로 한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다 나누어줘 버렸다고 슬퍼하지도 말자

    오도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향해 그리움의 손 흔들며

    함께 했던 사람들 다 져 버렸다고 눈물짓지도 말자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내가 이 세상에 나고 일하며

    아낌없이 받은 돈들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세상이 내게 준 그 수많은

    햇빛이라던가 달빛이라던가 빗방울이라던가 눈송이라던가

    이슬을 박은 새벽거미줄 같은 풍성한 화폐들이 떠오르고

    가진 것 없는 마음도 까닭 없이 넓어져

     

    내가 가도 이 세상엔

    저 수많은 생명의 화폐들이 있어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거라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고

    내가 가고 난 뒤 어느 날에도

    또 어떤 아이가 이 단풍나뭇잎 아래에서

    나처럼 위안 받을 생각을 하니

    나 이제 가도 되겠다

    (그림 : 김기홍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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