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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탁번 -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시(詩)/오탁번 2013. 12. 26. 13:52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그림 : 한순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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