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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윷놀이 하다가
눈깜짝이 한 씨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그만 쓰러졌다
사람들이 놀라 일으키자
ㅡㅡ뭐여? 왜들 이려?
한마디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동 트자마자 일어나
개 혓바닥같이 생긴 괭이를 들고
논꼬 보러 가던
동네에서 제일 바지런한
조쌀한 한 씨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한 씨 삼우제 날
동네사람들이 모여
경로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가뭇가뭇한 한 씨 얼굴이
술잔 속에
눈부처인 양 언뜻 비쳤다
이승 저승이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너무 가까워서
동네사람들은 함빡 취했다
ㅡㅡ잔 안 비우고 뭐 해유?
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그림 : 강혜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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