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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그 옛날의 사랑시(詩)/오탁번 2014. 11. 29. 16:10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하늘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羽化되어 하늘을 날으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그림 : 이희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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