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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쏟아져야 할 텐데 비가 온다
소한 대한 추위에 불알까지 꽁꽁 얼어야 할 텐데 비가 온다
겨드랑이에서 게을러 터진 땀냄새 나고
지난해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움도 다 젖는다
흰 눈 내려서 이 세상 어둠 모두 뒤덮어서
쑥덤불 같은 내 마음도 흰 도화지처럼 되어야지
순백의 마음 엮어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수 있다
한겨울 깊은 저녁인데 비가 내린다
슬픈 사람 슬픈 사람끼리 눈을 맞으며
저 멀리 원시림이 매몰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눈을 밟으며 귀가 맑게 틔였던 지나가버린 아침을
겨울비 맞으면서 찾을 수가 없는 슬픔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그때 그 이름
저녁해 빛날 때마다 그토록 숱하던 그리움도
이제는 철 지난 겨울비로 흉칙하게 흩어진다
눈 맞으며 달려가고 싶은 그 옛날의 사랑이여
비가 온다 비가 온다 겨울비가 온다
겨울비에 젖어서 그 옛날의 사랑은 간 곳이 없다
(그림 : 이순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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