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택수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시(詩)/손택수 2021. 9. 6. 11:54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였다
종로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가끔식 들르던 구두 수선집
가게 귀퉁이에 기타가 있었다
몇 년을 들러도 낯가림이 많은 주인처럼 쑥스럽다는 듯이
돌아서서 늘 등만 내밀고 있는 기타
소리를 낼 줄은 아는가 싶어서 한번은 넌지시 곡을 청했다
혼자서 연습한 거라 연주라고 할 수 없어요
거듭된 단골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 찬찬히 기타를 품에 안던 사내
애인을 안을 때가 저럴까
가슴팍에 끌어안은 기타는 사내처럼 허름하고
함부로 묻은 구두약에 줄마저 녹슬었는데
알람브라, 물소리가 검은 손톱 사이에서 뿜어져나오고
사라진 왕국의 꿈이 이베리아반도의 마른 수로를 적시며 흘러가고
구두코에 빛나는 광처럼 사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었다
사나운 버스 소리도 곡에 맞춰 유순해진 잠시,
종로 YMCA 근처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였다
구두를 신을 때면 가끔씩 그 기타가 생각나서
줄을 고르듯이 끈을 잡아당겨본다
떠도는 걸음걸음 어쩌면 발장단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아서
발등 위의 나비매듭이 딴은
꽃밭 위의 날갯짓 같기도 하여서
(그림 : 오진국 화백)
'시(詩) > 손택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택수 - 밥물 눈금 (0) 2022.01.23 손택수 - 석류 (0) 2021.09.14 손택수 - 의자 위에 두고 온 볕 (0) 2021.07.26 손택수 - 있는 그대로, 라는 말 (0) 2021.07.18 손택수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0)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