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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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차심시(詩)/손택수 2016. 12. 18. 18:09
차심이라는 말이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들어가 그릇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 (그림 : 최인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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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차경(借景)시(詩)/손택수 2016. 12. 17. 10:54
한옥에서는 풍경도 빌려 쓰는 거라네요 차경(借景), 창을 내고 문을 내서 풍경을 들이는 일이 빚이라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 직업이 마땅찮아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저도 풍경 대출을 받고 싶어요 집 살 때 빚지는 것도 누가 재산이라고 그랬지요 빚 갚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어느새 제 집을 갖게 된다고 풍경 좋은 곳은 다 부자들 차지라지만 아무리 좋은 액자인들 뭐하겠어요 청맹과니처럼 닫혀만 있다면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지기 힘든 게 풍경 빚인 줄도 모르겠어요 가난하고 외로워할 줄 아는 사람에겐 창가에 스치는 새 한 마리도 다 귀한 풍경이니까요 갚는다는 건 되돌려준다는 거겠지요 빌린 나도 풍경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도무지 뭘 빌려주었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앉아 있는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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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수정동 물소리시(詩)/손택수 2016. 8. 10. 17:30
수정동 산비탈 백팔 계단에 서면 통도사 금강계단이 겹친다 산복도로 내가 오를 계단 끝엔 가난한 불빛 한 점이 있고, 통도사 금강계단 끝엔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다 살아가는 게 묘기구나, 벼랑 위에 만든 계단이여, 끝없이 관절을 꺾는 힘으로 찾아가는 집이여, 가슴에 든 멍이 까맣게 죽은 빛을 하고 밤이 찾아오면 불이, 물소리를 켠다 금강계단 가물가물 번져가는 연등 속에서 부은 발을 어루만지는 물소리가 흘러나온다 저린 무릎 짚고 한 단 두 단 꺾어졌다 펴지는 물소리, 다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출렁이는 물소리 흘러내려간다, 부산 앞바다 그 너머 수평선 가슴에 든 멍이 쪽빛이 될 때까지는 수정동(水晶洞) : 부산광역시 동구에 속하는 법정동. 이 지역의 토질이 황토가 적고 모래가 많아서 비가 와도 신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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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검은혀시(詩)/손택수 2016. 7. 12. 14:15
아궁이 속 재도 되지 못하고, 시원하게 굴뚝 너머로 승천하는 연기도 되지 못하고 쿨룩쿨룩 기침이나 쏟아내는 그을음이 되었습니다 옛날 저희 할머니는 쓰다 만 빗자루를 그냥 버리면 귀신이 붙는다고 했지요 일평생 마당 등허리 긁느라 몽당그래진 싸리빗자루 아무 데나 나뒹굴게 내버려두면 원한 맺힌 귀신이 붙어 따라다닌다고 했지요 누구의 등 한 번 시원하게 긁어주지도 못하고 온전히 타오르지도 못한 채 저도 빗자루 귀신이 되고 만 게 아닙니까 오갈 곳 없는 하루하루 이 생에 미련을 채 떨치지 못한 것들이 벽에 그을음을 만듭니다 대를 이어 켜켜이 그을음 벽지를 바릅니다 그을음 속에 가신 제 아비의 묵은 편지들이 있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자들을 기다리는 소지가 있고 감꽃 지는 뒤란에서 읽던 책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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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살구나무 그림자가 바위를 미는 동안시(詩)/손택수 2016. 6. 24. 23:11
구름이 산등성이를 밀고 지나갑니다 번지는 먹그늘에 산이 안색을 바꿉니다 오늘은 기다리는 일로만 하루를 온전히 탕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마당에 비질을 하고, 맑게 갠 귀퉁이에 살구나무 그늘이 밑동의 바위를 미는 걸 지켜보렵니다 나무가 밀다 만 바위귀에 툭, 모래알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하루 술렁이는 그림자 따라 바위도 할 말이 많은 표정입니다 바위도 외로우면 금이 가고, 쩌억 저라도 쪼개 마주하고 싶은 것일까요 한때 저는 저 나무둥치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파 넣었지요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지워지고 지워져서 한잎이 되고, 또 한잎이 되어 돋아나는 당신이 있습니다 이 오랜만의 기다림은 한눈을 잘 팔던 아이를 생각나게 합니다 저물녘 쿨럭이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아이 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