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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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장생포 우체국시(詩)/손택수 2015. 5. 25. 13:11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 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도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조릴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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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범일동 블루스시(詩)/손택수 2015. 3. 8. 10:09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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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아내라는 이름은 천리향시(詩)/손택수 2015. 3. 6. 19:05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 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 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속아 주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그림 : 이수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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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시(詩)/손택수 2014. 10. 28. 01:45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지만, 수리하면 쓸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 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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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외할머니의 숟가락시(詩)/손택수 2014. 4. 7. 00:11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그림 : 변응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