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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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빗방울화석시(詩)/손택수 2016. 3. 20. 10:11
처마 끝에 비를 걸어놓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놓고, 몇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쫓아다니던 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듣는 일 가난한 골목길을 따라 퉁퉁 부은 다리로 귀가하는 밤길 긴 통화를 하며 길바닥에 부딪는 똑똑똑 소리를 내 방문 노크 소리처럼 받는 일 툇마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헤아리다가 나는 묵은 편지를 마저 읽으리라 빗방울 받아먹는 귀만큼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또르르 굴러가던 방울이 쏘옥 들어가 박히던 움푹 팬 자리, 그런 자리 하나쯤 만들어놓고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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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아버지의 등을 밀며시(詩)/손택수 2016. 1. 8. 22:49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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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시(詩)/손택수 2015. 9. 17. 21:34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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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곡비시(詩)/손택수 2015. 9. 17. 21:28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곡비(哭婢) : 장례(葬禮) 때에 곡성(哭聲)이 끊어지지 않도록 곡(哭)하는 비자(婢子). 대개 왕실의 국장(國葬)인 경우 궁인(宮人)을, 사대부의 경우 비(婢)를 시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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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하늘골목시(詩)/손택수 2015. 8. 11. 12:42
성당의 종소리가 노을 속으로 퍼져나가면 빈 도시락통을 딸랑거리며 돌아오시던 어머니, 어린 누이들과 함께 기다리던 골목은 정이 많아서, 처마와 처마가 사이좋게 이마를 맞대고 있었지 어린 우리들 시장기처럼 늘 허기가 져 있던 골목이지만 창문에서 뻗어 나온 팔이 맞은 편 팔을 향해 국수 그릇을 건네면 김이 식지 않도록 후루룩 하늘도 몇 젓가락씩 받아먹던 골목 처마와 처마사이로 길을 낸다는 건 좁은 창문으로 금방 부친 전을 주고받고 멀리서 온 짐꾸러미를 대신 받아 주기도 하면서 내 것이 아닌 체취도 조금씩 품고 살아보자는 것이었을까 다섯 살 겁 많은 시골 아이를 받아준 문현동 옛집 상처투성이 보르크와 벽과 벽 사이로 빨랫줄이 내걸리던 골목 더러는 아버지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탁지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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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시골버스시(詩)/손택수 2015. 8. 9. 10:05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그림 : 고재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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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수채시(詩)/손택수 2015. 6. 10. 11:19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하디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성미산 너머 북한산 쪽으로 간다 한강에서 날아오른 물새 두엇이 물풀 냄새를 끼치며 선교사 묘지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