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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택수 - 수채
    시(詩)/손택수 2015. 6. 10. 11:19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하디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성미산 너머 북한산 쪽으로 간다

    한강에서 날아오른 물새 두엇이 물풀 냄새를 끼치며 선교사 묘지 위로 날아간다

     

    버스가 오기 전 둘 데 없는 눈으로 나는 바닥에 구르는 모래알을 보고,

    모래와 모래가 등을 부비는 사이의 반짝임, 흩어지면 사라지는 틈을 보고,

    여위면서 바래가는 가로수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대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는 아내와 시래기 마르는 처마 아래서

    나물을 다듬는 어머니의 집 간난도 설움도 불빛 하나로 단촐해진 지붕을 찾아가리라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

    (그림 : 송금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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