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
손택수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시(詩)/손택수 2021. 5. 12. 17:58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그림 : 설종보 화백)
-
손택수 - 녹슨 도끼의 시시(詩)/손택수 2021. 4. 9. 13:31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
-
손택수 -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시(詩)/손택수 2020. 8. 16. 11:46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를 하던 그가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 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꼽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잘 가라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추락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집중된 순간 순간들의 아찔한 황홀 당겨진 근육들이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를 응원할 때 나른하던 공기들도 칼날이 지나간 듯 쫙 소름이 돋는다 뜨거운 포옹과 날렵한 결별 속에서 태어나는 몸 사랑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겠다 출렁, ..
-
손택수 - 송아지시(詩)/손택수 2020. 8. 16. 11:38
구들방 윗목 헌 가마니때기에선 두엄 냄새가 났다 두엄 속 씨고구마에 물을 주던 밤이었다 처마 밑 고드름이 한 자쯤 더 길어진 밤 할아버지 옆에선 송아지가 새근거리고 있었다 어미 뱃속에서 툭 떨어질 때 숨을 쉬지 못해 인공호흡을 시켰던 송아지 예정보다 일찍 나온 송아지는 유난히 야위어서, 방에서 사흘 낮밤을 꼬박 곤하게 새근거렸는데 어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젖먹이 그 보드라운 털에 볼을 부비고 있으려면, 씨고구마 자줏빛 싹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고구마 싹처럼 송아지 머리에도 머잖아 뿔이 돋겠지 뿔이 돋으면 그도 어미소처럼 사흘같이 고구마 밭을 매러 가야 하겠지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다독다독 지붕을 덮는 눈 속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노라면 잠 못 드는 어미의 쇠방울 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어메..
-
손택수 - 저녁을 짓다시(詩)/손택수 2020. 8. 16. 11:14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지 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으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 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같이 연습해본다는 거니까 저녁 속엔 아파트 단지를 도는 식료품 트럭의 두부 종소리가 있고 증기기관차처럼 칙칙폭폭 달려가는 밥솥이 있지 손마다 눈금을 따라 오르내리는 밥물의 수위가 있지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지은 밥이라는 말처럼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 하고 싶네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의 이름으로 (..
-
손택수 - 먼 곳이 있는 사람시(詩)/손택수 2020. 7. 22. 18:37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
-
손택수 - 냉이꽃시(詩)/손택수 2020. 3. 13. 08:24
냉이꽃 뒤엔 냉이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그림 : 이현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