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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시(詩)/손택수 2020. 8. 16. 11:46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를 하던 그가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 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꼽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잘 가라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추락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집중된 순간 순간들의 아찔한 황홀
당겨진 근육들이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를 응원할 때
나른하던 공기들도 칼날이 지나간 듯 쫙 소름이 돋는다
뜨거운 포옹과 날렵한 결별 속에서 태어나는 몸
사랑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겠다
출렁, 깊게 패이는 메트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쏘아올려야 하는 자의 고독이 장대를 들고 달려간다
폭발하는 한 점 한 점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물수제비 물결이 인다
(그림 : 박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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