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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저녁을 짓다시(詩)/손택수 2020. 8. 16. 11:14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지
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으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
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같이 연습해본다는 거니까
저녁 속엔 아파트 단지를 도는 식료품 트럭의 두부 종소리가 있고
증기기관차처럼 칙칙폭폭 달려가는 밥솥이 있지
손마다 눈금을 따라 오르내리는 밥물의 수위가 있지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지은 밥이라는 말처럼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 하고 싶네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의 이름으로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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