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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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시(詩)/손택수 2019. 4. 25. 09:10
멀리 여행을 갈 처지도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디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에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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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월내역시(詩)/손택수 2018. 7. 29. 20:28
달 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동해남부선이 가끔씩 철로보다 더 가늘고 긴 여운을 남기며 지나가는 간이역. 지상에서 발톱을 다친 물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역사 가까운 초등학교 쪽에선 풍금소리가 새어나오고, 풍금소리에 맞춰 개망초 달개비 참나리 고만고만한 꽃들이 하교길에 한눈을 팔며 놀고 있다. 돌담 위에선 고양이 수염처럼 빳빳한 햇살 아래 청어가 마른다. 선로보수 작업중 잠시 머무는 동안, 잠시 머물며 줄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생두부 한 모에 잔소주를 파는 민짜집을 생각하고, 낮게 수그린 처마와 처마가 이마를 맞대고 틈틈이 손을 꺼내어 더운 음식을 주고 받는 창문들을 생각한다. 고압선이 지직지직 달 속으로 들어간다. 어부의 집에서 나온 가느다란 길 하나가 낚싯줄처럼 팽팽하게 바다를 당긴다. 바다가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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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눈 내리는 밤의 일기(日記)시(詩)/손택수 2017. 12. 12. 21:00
눈 내리는 밤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등불 속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소리. 귀고리처럼 매달린 문고리를 흔들다 가는 바람 소리. 공책을 메꿔가는 연필소리만 들린다 그리운 게 많아질수록 살기는 더 힘들어지는구나 처마 끝에 가닥가닥 하얀한 주렴을 치고 주렴이 저희끼리 부딪히며 내는 아련한 여운 속에서 나는 왜 받지도 못한 편지의 답서를 미리 써두어야 했던가 모든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더디게 뻗어오는 눈길 하나를 기다려야 했던가 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묵은 사진첩을 들춰본다 하릴없이 귀퉁이가 다 닳은 일기장을 펼쳐본다 지문처럼 찍힌 가파른 내 안의 등고선을 맴돌다, 자작나무숲과 까마귀와 묘지가 있는 언덕을 지나, 불꽃나무 산채에 이르는 눈발 눈발의 그 부르튼 발등이 보이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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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제비에게 세를 주다시(詩)/손택수 2017. 11. 27. 11:44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신접살림을 차렸다 부스스 일어나 올려다보면 밤낮으로 깨소금을 떨어뜨린다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덕분에 가난한 나도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관리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방을 빼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방세 대신 꼬박꼬박 챙겨주는 새울음소리를 염치없이 받아쓰고 있는 나도 이제는 집주인으로서의 그 알량하고 딱한 체면이라는 걸 알게 된 셈인가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묵었다 간 뒤다 (그림 : 김분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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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가덕 대구시(詩)/손택수 2017. 9. 9. 17:05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 비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어키고 싶었지요 언젠가 찾아간 가덕 대구 기억나시는지요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치운 날이었지요 대구(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 해풍에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볐으면 이리 꾸덕꾸덕 쫄깃해진 대구 알처럼 붉은 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 합니까 가덕도(加德島) :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있는 남해 상의 섬. 면적 20.78㎢로 부산광역시에서는 대저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영도 면적의 약 1.5배이다. 부속도서로는 눌차도가 있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