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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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사람의 그늘시(詩)/강연호 2015. 8. 22. 20:00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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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작은 배가 있었네시(詩)/강연호 2015. 8. 22. 15:18
그대 데불고 간 세월의 강물 따라 나 흘러가지 못했네 어쩌면 그리움 어쩌면 외로움 같은 것들이 사실은 견딜 만한 거 아니냐며 뒷덜미 잡아채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춘 그 때부터 건널목 이쪽에서 신호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서슬 시퍼런 강물 출렁일수록 얼마나 많은 슬픔이 나를 에워싸는지 나 일찍이 철없어 헤아리지 못햇네 그대 이미 물결에 떠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만나 나누었던 사랑이나 눈물 혹은 희미한 추억의 힘만으로도 능히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객기 부렸네 어차피 한 번은 다쳐야 할 상처라며 그대 데불고 간 세월의 강물 말라붙도록 움키고 또 움키었지만 언젠가는 나도 흘러가야 할 물결이라며 그동안 밥 잘 먹고 건강하려 애썼지만 아직도 나를 멈춰 세운 붉은 신호등 바뀌지 않고 건널목 이쪽에서 나 마냥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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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섬진강에 지다시(詩)/강연호 2015. 6. 17. 17:16
가을 섬진강을 따라가려면 잠깐의 풋잠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구례에서 하동쯤 지날 때 섬진강은 해가 지는 속도로 흘러간다 어쩌면 지는 해를 앞세우기 위해 강은 제 몸의 만곡을 더욱 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는 길도 섬진강을 따라가므로 갈 길 바쁜 사람도 홀연 마음 은근해진다 나고 죽는 일이 괴롭다면 내처 잠들어 남해 금산 바닷물에 처박힐지 모른다 문득 깨어나 모골이 송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헛것이 이끌었다고 말하지는 말자 다 섬진강을 따라나선 죄일 뿐 정신 차리고 싶다면 쌍계사 절간 밑에서 은어회라도 바득바득 씹어보자 너도 먼 길을 취해 여기까지 왔구나 날것의 몸보시를 받다 보면 출가와 환속은 한통속처럼 저물 것이므로 그러면 또 삶이란 죽음이란 녹슨 단풍잎같이 애면글면 글썽거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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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폐가시(詩)/강연호 2014. 10. 29. 01:22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물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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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시(詩)/강연호 2014. 10. 16. 17:15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 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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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술과의 화해시(詩)/강연호 2013. 12. 27. 21:34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