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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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