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복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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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이후시(詩)/복효근 2020. 8. 14. 16:50
나 때문이라 말했지만 너 또한 너 때문이라 했다 맞지 않은 말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때로 과도한 반성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해서 날아가는 새에게도 허허로이 손 흔들어보는 아침이다 우린 살아있을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너에게 비가 오고 내게도 비가 내린다면, 구름이 지나간다면 식어가는 차를 마저 마시며 남은 몇 개의 잎사귀에도 가만한 눈빛을 줄 일이다 그러해야 하리라 생각도 해보지만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 사랑을 핑계로 삼는 일은 비를 구름을 저 풀잎들을 미안케 하는 일이므로 굳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왔다, 스쳐갔다, 지나갔다 믿는 것뿐이다 부질없으나 그 부질없으므로 식은 찻잔에도 너는 있고 잎사귀에 맺힌 빗방울에도 너는 있다고 믿으며 처음 같은 눈길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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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부레옥잠시(詩)/복효근 2020. 4. 23. 11:36
누군가의 이름에 세 들어 사는 자는 누구의 꽃을 피울까 옥잠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부레도 아닌 것이 남의 이름에 기대어 옥잠으로 불리며 연잎처럼 물에 떠 있다 뿌리를 뻗어 흙에 닿으려 해도 흙에 닿는 순간 부레를 버려야 하고 옥잠에 이르려면 물을 버려야 한다 연잎은 더욱 아니어서 한 덩어리 불타는 꽃을 제 이름을 증명할 수도 없다 오늘 아침 부레옥잠은 부레옥잠의 꽃을 피웠다 부레옥잠은 부레가 아니어서 옥잠이 아니어서 더구나 연잎이 아니어서 부레옥잠이다 부레옥잠은 또한 부레옥잠이 아니어서 오늘 아침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부레옥잠의 꽃을 피웠다 다만 이름이 부레옥잠에 세 들어 살기 때문이다 (그림 : 허정금 화백) Eric Carmen - All by myself Hajime Mizoguchi(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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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소금의 노래시(詩)/복효근 2020. 4. 16. 16:53
바다는 뉘를 그려 제 몸에 사리를 키웠는지 곰소 염전에 쌓인 소금더미 보겠네 그대, 소금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푹푹 빠지는 갯벌이거나 난바다 바닷물 속 뒹굴고 나자빠지면서 부서지고 아우성치던 흐느낌도 잦아들어 내 것 아닌 것 바람에 돌려주고 햇살에 돌려주고 끝끝내 더 내어줄 수 없을 때까지 내어주고 비로소 부르는 순백의 소금 노래를 그대 듣는가 에라 모르겠다 다 가져가라 내던지고 돌아서는 가슴에서 묵주알 구르는 소리 같은 것 눈물이 사리가 되어 내는 그 고요한 소리의 반짝임 같은 것 (그림 : 박주경 화백) Paul Mauriat - Sound of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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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쑥부쟁이 연가시(詩)/복효근 2020. 3. 29. 17:01
그 가시내와 내가 그림자 서너 배쯤 거리를 두고 하굣길 가다보면 마을 어귀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가시내는 책보를 풀어놓고 아예 가을 다 가도록 꽃이 몇 송인지 한참이나 꺾다간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곤 했었지 저만치 뒤에 쪼그리고 앉아 가시내 스치는 손끝에 내 마음도 피어서 꺾이는 저 쑥부쟁이 꽃빛깔 꽃빛깔로 달아오르곤 했었지 세월도 그 가시내 무심한 눈길 몇 번 마냥 흘러서 마을 어귀 지날 때 시방은 누가 거기 홀로 피어 울고 있는지 쑥부쟁이,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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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진주 눈길시(詩)/복효근 2020. 3. 25. 17:32
전국에 대설주의보 내린 날 남원에서 진주까지 가야 할 직행버스 대한여객은 운봉고원 눈이 너무 쌓여 인월까지밖엔 가지 못하겠다고 멈춰섰다 눈 오는 지리산은 옷 벗은 여인의 속살 같고 나야 목적지까지 다 왔으니 그만인데 진주라는 이쁜 이름이 자꾸만 입안에서 맴돌아, 가지 않아도 되는 진주 가는 눈길을 한 사흘 헤치며 눈부신 진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온통 눈 빛깔 하나로 기다림과 그리움이 하얀 진주 사람들에게 길 막혀 더욱 그리운 이들의 소식과, 세상에 다시없을 저 눈 덮인 지리산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풀어놓고 싶었다 저 눈 속에 파묻혀 한 사흘이면 우리가 죄 없는 눈 나라 시민으로 순결해지리라 눈은 막무가내로 더 내리고 돌아갈 남원길도 막막한데 눈 땜에 진주에 못 가는 사람들에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