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윤성택
-
윤성택 - 구두로 말하길시(詩)/윤성택 2014. 1. 17. 18:24
밤이 보도블록에 갇히면 계단이 몰려온다. 그때마다 건물의 모서리가 한장씩 넘겨진다. 막 접힌 갈피 길이 깡통을 끼고 있다. 차버린 것은 잘못이야 오래 전 상처한 자전거가 보관소에 몸을 묶어 자해중이다. 여자는 울면서 떼어낸 발끝의 수화기를 내려놓을 곳이 없다. 뎅뎅뎅 물방울무늬 짧은치마가 바람에 흔들린다. 차단기 내려지고 성급한 기차는 관음증으로 밝다. 담쟁이가 우르르 헝겊처럼 방음벽을 흘러내린다. 아파트 창들은 잘 닦여 빛나는 밤의 광이다. 구두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굳게 다물었던 침묵의 틈서리가 열리자 밖은 연신 비가 내렸다. 신고 벗고 때론 뒤를 구겼을 날을 고스란히 필사해 놓은 걸까. 좁은 골목 같은 잔금 어딘가, 한번쯤 길을 잃었던 것도 같다. 그때 잘못 든 길이 이 길이었노라고 앙 다물지 못..
-
윤성택 - 꽃이 피다시(詩)/윤성택 2014. 1. 17. 18:21
1 공사장 모퉁이 플라타너스가 표지판으로 아랫몸을 가리고 서 있다. 인부는 어디로 갔는지 퍼런 철근들이 저희끼리 묶여 있다. 간간이 잡초들만 바람을 불러모아 수근거릴 뿐, 계절을 문신한 잎새 하나 후미진 골목에서 뛰어오다 멈춰 선다. 늙은 전신주가 제 힘줄로 끌어 모은 낮은 집들 너머, 잠시 정전이 되는 하늘에는 길을 서두르는 먹구름이 송신탑에 걸려 있다. 2 전기 스토브가 덜 마른 속옷에게 낯빛을 붉힌다. 형광등이 한낮을 키우며 시들지 않는 것들을 읽어낸다. 두통에 시달리다보면 꽉 잠가지지 않는 수돗물이 웅크려 떨어지고, 거리를 배회하던 빗소리 굵어진다. 몇 알의 감기약 삼키자 빗물이 휘청휘청 진눈깨비로 주저앉는다. 미술학원 창가, 젖은 스케치북 밑그림 밖으로 봄꽃들이 번져 나온다. 스위치를 내리면 발..
-
윤성택 - 희망이라 싶은시(詩)/윤성택 2014. 1. 17. 18:16
베란다 버려진 화분에서 가늘게 뻗어 오르는 잡풀들이 싱그럽다 누군가 씨를 뿌린 것도 아닌데 햇살에 기대어 제 목숨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면 문득 나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놓여진 술병에라도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생각들을 펼치고 서로서로 나누고 마시며 우습거나 슬프거나 이미 떠나간 일이거나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리는 술잔의 그 더워진 마음을 보고 싶다 병뚜껑을 돌려 따면서 차가운 술이 어떻게 뜨거움으로 마음 덥혀 오는지 바람이 부는 길로 풀씨들이 날아온 길로 점점이 피어나는 생각들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내 마음 다그치며 보여준게로구나 바람 속에서 마음 풀씨하나 품고 살아갈 긴긴 세상을 위하여 (그림 : 이수동 화백)
-
윤성택 - 산동네의 밤시(詩)/윤성택 2014. 1. 17. 18:14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
-
윤성택 - 떠도는 차창시(詩)/윤성택 2014. 1. 17. 17:49
가로등에서 은행잎이 쏟아져 내렸다 조금씩 말라가는 것은 금간 화분 같은 상점, 휘감던 뿌리들이 틈틈마다 창문을 틔운다 누구나 타인을 데려간 시간 속에서 그리운 이름이 자신을 데리고 나올 때가 있다 창문은 산화된 필름처럼 하나의 색으로 한 장면만 비춰온다. 빛에 갇힌 거리를 바라보지만 가깝거나 먼 네온에 잠시 물들 뿐 기억에게 이 도시는 부재의 현기증이다 몇몇이 버튼을 누르듯 과거에서 내리고 나도 버스에서 내리면 당신은 시선을 바꿀 것이다 종점까지 밀려가는 버스를 탄 사람은 머지않아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는 밤 나는 눌러 줄 때에만 붉은 빛이 스미는 심장이거나 기다림, 벽이었다고 어느 손이 나를 불러들인다 몇 년 전 바람에도 잠시 잠깐 먼 거리에 붉은 빛이 돈다 미련도 없이 작별도 없이 정류장을 떠나고 뒤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