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택 - 산동네의 밤시(詩)/윤성택 2014. 1. 17. 18:14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림 : 김정호 화백)
'시(詩) > 윤성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성택 - 실종 (0) 2014.01.17 윤성택 - 구두로 말하길 (0) 2014.01.17 윤성택 - 꽃이 피다 (0) 2014.01.17 윤성택 - 희망이라 싶은 (0) 2014.01.17 윤성택 - 떠도는 차창 (0) 201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