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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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포장마차시(詩)/이재무 2014. 10. 22. 21:50
포장마차는 술 취한 승객들을 싣고 달린다 마부는 말 부리는 틈틈이 술병을 따고 꼼장어를 굽고 국수를 말아 승객들의 허기를 채우느라 여념이 없다 술 취한 승객들은 마차의 속도를 모른다 하지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니까 포장마차는 시간의 도로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승차와 하차하는 사람들 후끈 달아오른 실내에서 계통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바깥은 찬바람이 불고 빈 술병은 한구석에 쌓여 작은 산을 이룬다 이윽고 종착역인 새벽에 도착한 마차가 마지막 승객을 토해놓고 마부는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켠다 어디 먼 데서 기적 같은 말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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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라면을 끓이다시(詩)/이재무 2014. 6. 6. 12:07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 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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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위대한 식사시(詩)/이재무 2013. 12. 29. 16:31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는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뜨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그림 : 오종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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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논산 장시(詩)/이재무 2013. 12. 28. 18:16
장 서는 날, 장 서봐야 예전 같지 않아서 시늉뿐이지만 한번이라도 걸리면 긴한 일로 친정엄니 제사 건너뛴 것 마냥 괜시리 서운하고 허전해서 서산댁 일 없어도 장에 가는데 오늘도 지난 늦가을 짬 부려 수확한 도토리 한 말하고 더덕이며 고사리 보따리 챙겨 장 보러 간다 그래도 장 서는 날이라고 텅텅 비던 버스가 머리 허연 중늙이들에다가 강아짐 씨암탉이며 새끼돼지들로 그들먹하니 타고 해서 모처럼 그럭저럭 붐비는 게 차주마냥 반갑기만 하다 간이 승강장에 버스가 설 때마다 경황 중에도 오르는 사람 치마며 바지말기 부여잡고 안부 챙기는 것 잊지 않는다 아이고 새말 사둔댁 어떠유? 신수는 훤해보이는구만요 아이고 어떻긴 뭐가 어뗘? 대간하지! 대간혀 죽겄어! 뭐가 그렇게 대간하대유 애덜 다 컸지 영감 밤 잘 드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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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민물새우는 된장을 좋아한다시(詩)/이재무 2013. 12. 27. 22:11
민물새우는 된장을 좋아한다 소문난 악동들 따라 나도 소쿠리에 된장주머니 달아놓고 저수지 가생이에 담가놓는다 미역 즐기다 해거름 출출해지면 소쿠리 건져 올린다 된장주머니 둘레에 새까맣게 민물새우떼가 매달려 있다 그걸 담은 주전자가 제법 묵직하다 집으로 돌아오다 남의 집 담장 위 더운 땀 흘리는 앳된 애호박 푸른 웃음 꼭지 비틀어 딴 후 사립에 들어선다 막 밭일 마치고 돌아와 뜰팡에서 몸에 묻은 흙먼지 맨수건으로 터는 엄니는, 한 손에 든 주전자와 또 한 손에 든 애호박 담긴 소쿠리 번갈아 바라보다가 지청구 한마디 빼지 않는다 "저런 호로자식을 봤나, 싹수 노란 것이 애시당초 큰일 하긴 글렀다, 간뎅이 부어도 유만부동이지 남의 농사 집어오면 워찍한다냐 워찍하길" 그런데도 얼굴 표정 켜놓은 박속 같다 아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