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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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의뭉스러운 이야기 2시(詩)/이재무 2016. 7. 30. 12:28
보령댁은 일 년 한두 번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갈 때마다 버릇처럼 큰 보따리를 이고 간다. 보따리 속에는 고향 산천에서 난 온갖 나물이 들어 있다. 산도라지며 더덕, 고사리, 곰취, 냉이, 달래, 머위, 산미나리, 씀바귀, 엉겅퀴, 느릅치, 두릅, 삿갓나물 등속 그때그때 철 따라 나는 산지 나물을 뜯어 싸가지고 가는 것이다. 딸 내외는 그때마다 몇 푼이나 한다고 그 고생이냐고 질색이지만 어찌 이것을 값으로만 매길 수 있겠는가. 불쑥 고까운 마음이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령댁은 아직 한 번도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걸 딸네 집에 가기 전에 지하철 지하도에 좌판으로 깔아 놓고 팔기로 하였다. 외손주 외손녀 주전부리값이나 할 요량이었다. 오후 내내 쭈그려 앉아 있자니 무릎 팔다리가 쑤셔 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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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닥터 지바고시(詩)/이재무 2016. 7. 2. 18:54
군중 속에서낯선 듯 낯익은 한 여자를 보았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그늘 마당 가득 검푸르게 출렁거리던 그해 여름의 하오 먼지 뽀얗게 내려 쌓인 평상에 앉아 손가락 낙서로 내게 은근한 마음 전하며 수줍게 웃던, 살짝 덧니가 엿보이던 웃지 않아도 볼우물 패던 여자 호수처럼 깊은 눈 속에 젖은 돌로 가라앉아 가슴 먹먹하던 그날의 여자를 떠나 처방 듣지 않는 봄을 시름시름 앓고 나니 소년은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다 저녁 여름비 내리고 아욱국 내음 번지는 인환의 거리 등 가려울 듯 등 가려울 듯 그러나 끝내 돌아보지 않고 한손엔 손때 얼룩덜룩한 가방 또 한 손으로는 꽃 진 자리 얼굴 내민 햇복숭아 같이 앙증맞은 아이 손잡고 총, 총 , 총 시나브로 멀어져 가는 어제의 사랑 까치발로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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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감자꽃시(詩)/이재무 2016. 7. 2. 18:51
차라리 피지나 말 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를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 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그림 : 조창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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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물속의 돌시(詩)/이재무 2016. 7. 2. 18:48
동글동글한 돌 하나 꺼내 들여다본다 물속에서는 단색이더니 햇빛에 비추어보니 여러 빛 온몸에 두르고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동글납작한 것이 두루두루 원만한 인상이다 젊은 날 나는 이웃의 선의, 반짝이는 것들을 믿지 않았으며 모난 상(相)에 정이 더 가서 애착을 부리곤 했다 처음부터 둥근 상(像)이 어디 흔턴가 각진 성정 다스려오는 동안 그가 울었을 어둠 속 눈물 헤아려본다 돌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물의 깊이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이 그를 다녀갔을 것인가 단단한 돌은 물이 만든 것이다 돌을 만나 물이 소리를 내고 물을 만나 돌은 제 설움을 크게 울었을 것이다 단호하나 구족한 돌 물속에 도로 내려놓으며 신발 끈 고쳐 맨다 (그림 : 한형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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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깊은 눈시(詩)/이재무 2016. 7. 2. 18:41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잔치집에, 떡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 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실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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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아버지시(詩)/이재무 2016. 6. 8. 18:43
어릴 때 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 파거나 낫으로 풀 깎거나 도끼로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물고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그냥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