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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 파거나
낫으로 풀 깎거나 도끼로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물고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그냥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를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인터넷하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 다오
아버지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그림 : 남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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