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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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감나무시(詩)/함민복 2014. 1. 17. 20:40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그림 : 박광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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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눈물은 왜 짠가시(詩)/함민복 2014. 1. 17. 20:36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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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한포천에서시(詩)/함민복 2014. 1. 2. 12:55
도끼날로 얼음장 찍어 구멍 뚫어놓으면 양잿물에 삶은 빨래 한 함지박 이고 와 살얼음 걷어내며 빨래 헹구던 어머니 시려 팔목까지 붉다 푸르던 손 그 물가 둑에서 아카시아 열매 푸르르륵 푸르르륵 삭풍에 울었지 물여울이 풀어지는 무릎노리 물속에 들어가 파릇파릇 자란 메나리 뜯던 누이를 위해 고지박 불 피워놓고 아직 지느러미 덜 풀려 둔한 구구락지, 붕어 잡아 구우면 지글지글 심심하고 담백하던 물고기 살 아지랑이 아지랑이에 풀 돋아나면 신이 나 맨발로 토끼풀밭 내달리다가 벌 쏘여 간지럽던 아, 조그만 발바닥 계집애들 곰비임비 매끄러운 돌 쌓고 돌 깔아 물가에 방을 만들고 돌그릇 밥상을 차렸지 괜한 심술에 돌담을 허물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미역을 감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면 제자리에서 깽깽이걸음 뛰고 그래도 안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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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도라지밭에서시(詩)/함민복 2014. 1. 2. 12:51
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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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어민 후계자 함현수시(詩)/함민복 2013. 12. 27. 22:13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 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 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 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났시다 조금때 어부네 개새끼 살 빠지듯 해마다 잡히는 고기 수가 쭉쭉 빠지니 정말 큰일났시다 복사꽃 필 때가 숭어는 제철인데 맛 좋고 가격 좋아 상품도 되고..... 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 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 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 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 나오다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 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 참숭어만 냉겨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 언지는 버리고 그래도 힘이 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