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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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논 속의 산그림자시(詩)/함민복 2015. 10. 23. 12:24
물 잡아 논 논배미에 산그림자 드리워져 낮은 물 깊어지네 산그림자 산 높이의 열 배쯤 한 십여 리 어떻게 와서 저리 몸 담그고 있는지 거꾸로 박힌 산그림자 속 바위는 굴러 떨어지지 않고 나무는 움트네 개구리 울음소리 산그림자 깜깜하게 풀어놓던 며칠 밤 지나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인 농부들 푸른 모춤을 지고 산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뒷걸음치며 산에 모를 심네 바위 위에도 모를 꽂아 놓았네 산그림자 속에서 백로 한 마리 날아 나와 편 목 다시 구부리며 젖지 않은 발 적시며 산그림자 위로 내려앉네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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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한밤의 덕적도시(詩)/함민복 2015. 4. 29. 22:48
사릿발에 떠내려간 배 열흘 만에 찾았다고 날이 새면 덕적도로 배 찾으러 간다고 배 찾았시다 술 한 잔 했시다 신이 났던 아랫집동생이 등을 두드려 달란다 코스모스 아래 쭈그려 앉아 소라 아빠는 내일 버섯장을, 튼튼한 그늘을, 만든다고 먼저 가고 등을 두드려 주지 않는 내가 야속하다고 어여 가라 잃었던 것 되찾으러 뱃길 세 시간 해발 제로의 길 작게 흔들려도 몸 전체가 흔들리는 배를 타고 아침 일찍 어여 가야 하니 등은 달빛이 두드려 주고 있으니 야속하다 말고 되찾을 것 있는 너는 어여어여 가라 하고 고욤나무 아래 서서 오래 바라다본 달빛 푸른 바다 잃었던 것 되찾는 황홀함 무엇 있었단 말인가 내겐 무엇이 있을 거란 말인가 찬 들꽃 향이여 내 마음의 덕적도는 어디에 있는가 덕적도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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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쑥부쟁이시(詩)/함민복 2014. 10. 30. 21:45
- 추석 지난 일 생각 좀 해 보라고 덜컹덜컹 온몸 흔들어주누나 비포장도로, 흙먼지 날리며 고향에 갔었나니 아버님 묘보다 잔디 무성한 형의 묘에서 쑥부쟁이 뽑아낼 제 실핏줄 같은 가난의 뿌리 자꾸 끊어지더이다 왜가리떼처럼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닌 살붙이들 모여 버짐 피던 이야기, 검정고무신 하나로 술을 따라 마셨지요 여선생 호루라기소리에 앞으로 나란히 피어난 코스모스 밤길 밤엔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들아, 너희들도 고향으로 돌아갈지니 바람 불 때마다 스스로의 가시에 찔리며 붉게 익은 대추, 나무에 아버지 얼굴로 걸린 달, 달그림자로 길게 다리 펴보았던 영혼아 그날 밤 내가 흘린 눈물에 흙가슴 다 적셔주던 고향을 보았는감 그날 밤 내가 눈물 추스를 때 굽은 등 품어주던 산그림자 보았는감 쑥부쟁이야 쑥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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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서울역 그 식당시(詩)/함민복 2014. 2. 17. 12:00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그림 : 오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