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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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주꾸미시(詩)/함민복 2014. 2. 16. 18:41
뱃전에 서서 뿌려 두었던 빈 소라 껍질 매단 줄을 당긴다 먹이로 속이는 낚시가 아닌 길을 가로막는 그물이 아닌 알 깔 집으로 유인한 주꾸미들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머리 쪽으로 말아 올린 다리들 흡반에 납작한 돌 조개껍질 나무말뚝 껍질로 대문 닫아 건 채 물밑 바닥이 뻘이라 아직 대문 못해 건 놈은 올라오다 떨어지기도 하며 뭐야, 또 두 마리! 먼저 든 놈 대문 완벽하여 문이 벽이 되어 겹대문 겹죽음일세 뱃전에 서서 빈 소라 껍질 매단 줄을 당기면 배가 흔들리고 길에 매달린 집들이 흔들린다 (그림 : 정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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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시(詩)/함민복 2014. 2. 7. 01:47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 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 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수 있나 어쩌면 틀렸는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 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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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시(詩)/함민복 2014. 1. 21. 23:33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집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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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호박시(詩)/함민복 2014. 1. 21. 23:27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단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