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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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통도사 땡감 하나시(詩)/최영철 2013. 12. 25. 12:03
노스님 한 분 석가와 같은 날로 입적 잡아놓고 그날 아침저녁 공양 잘 하시고 절마당도 두어 번 말끔하게 쓸어놓으시고 서산 해 넘어가자 문턱 하나 넘어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고무줄 하나 당기고 있다가 탁 놓아버리듯 훌쩍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 하나 뭇 새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그 땡감 떫고 떫어 참 다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헛물만 켜고 간 배고픈 새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다고 땡감은 생각하고 스님을 떨구어낸 감나무 이제 좀 홀가분해 팔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그림 : 김한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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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어머니의 연잎시(詩)/최영철 2013. 12. 25. 12:03
못 가득 퍼져간 연잎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 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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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선운사 가는 길시(詩)/최영철 2013. 12. 25. 12:02
고창에서 선운사까지 두 명 타고 온 버스 두 남녀는 멀찍이 떨어져 창밖만 보았다 버스가 산문(山門)에 당도하자 앳된 소녀는 절을 등지고 후줄근한 사내는 절을 향해 걸어갔다 뒤를 한번 돌아볼까 하다가 그 마음이 동해 눈이 딱 마주칠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갔다 동백꽃 피는 봄도 상사화 피는 가을도 아닌 오다 말다 잠시 하늘이 빤한 초여름 장마 대웅전 안이 조금 들여다보이는 마루 끝에 앉았다 동해의 넘실대는 파도에 떠밀려온 사내는 동백꽃도 상사화도 없는 절집 너른 방을 혼자 지키고 있는 홀아비 부처를 바라보았다 꽃 떨어지고 잎 무성한 동백과 꽃 피기 전 잎 잠깐 무성한 상사화 보며 누구나 한번은 저렇게 푸른 날이 있는 것이라고 머지않아 잎 버리고 꽃도 버려야 할 날도 있을 것이라고 길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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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본전 생각시(詩)/최영철 2013. 12. 25. 12:00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장에 오백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는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원 그것을 입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 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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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어느 날의 횡재시(詩)/최영철 2013. 12. 25. 12:00
시장에 들어서며 만난 아낙에게 두부 한 모 사고 두부에게 잘게잘게 숨어든 콩 한 짐 얻고 주름투성이 꼬부랑 할멈에게 상치 한 다발 사고 푸른 밭뙈기 넘실대며 지나간 해와 바람의 입맞춤 한 아름 얻고 시장 돌아나오며 늘어선 아름드리 조선 소나무 어깨 두드려주는 덕담 한 마디씩 듣고 자리 못 구해 그 아래 보따리 푼 아지매 시들어가는 호박잎 한 다발 사고 호박이 넝쿨째 넝쿨째 내게로 굴러 들어오고 하루 공친 공사판 박씨 무어라 시부렁대는 낮술 주정 한 사발 얻어걸치고 아줌씨가 받아먹을 잘 달구어진 욕지거리 무단히 길 가던 내가 공으로 받아먹고 성난 볼때기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저물녘 해 내 뒷덜미에 와서 편안히 눕고 내일 뜰 해는 저 산동네 입구 강아지 집에 먼저 와 있고 아무렴 그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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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공친 날의 풍년가시(詩)/최영철 2013. 12. 25. 11:59
어느 봄날 춘궁기 주막거리 외상값 떼먹고 깡마른 들판을 내팽개치고 나온 그들은 지금 인력시장 옆 구멍가게에서 주전부리가 한창이다 일당 놓치고 라면에 빵에 늦은 아침을 때우는데 마침 가는 빗줄기가 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떨어졌고 초가을 가랑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중 하나 에이 오늘도 공쳤다며 막걸리 서너 통 바닥에 늘어놓았다 일찍부터 줄 선 젊은 아이들 보며 오늘 또 공친 줄 벌써부터 알았던 중늙은이들이 입맛 다시며 엉덩이 당겨 앉으며 때마침 마누라에게 고해바칠 핑계거리가 되어준 가랑비가 고마웠던 것이다 먹다 만 라면 국물 동그란 파문으로 깨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던 훈김들이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친 날, 대포 한 잔 하는 사이 새우깡이 젖고 히끗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