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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과 오래 살았다
내가 안경을 데리고 산 줄 알았는데
안경이 나를 데리고 살았다
내 길은 보이지 않고
안경이 가자는 길을 따라왔다
잠들기 전 내가 안경을 벗어둔 줄 알았는데
안경이 나를 벗어두었다
안경이 꾸었던 꿈을 나는 훔쳐보았다
안경이 닦아 놓은 해맑은 꿈을 따라다녔다
내 코가 안경다리를 받든 줄 알았는데
안경다리가 내 코에 양반다리를 했다
더듬더듬 내가 안경을 찾는 줄 알았는데
안경이 눈을 번득이며 나를 찾아와 주었다
내가 본 게 단 줄 알았는데
안경이 돌아서서 차린 딴살림이 한 보따리다
너의 허물을 내가 눈감아준 줄 알았는데
네가 내 허물을 다 눈감아 주었다
(그림 : 이현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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