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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닐 때가 좋았다
돈이래야 고작 몇천원, 아니면 몇백원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며 만화대본소 앞에도 서보고
구멍가게 앞에도 서보고 삼류극장 앞에도 서보고
호주머니 속이 답답해서
돈은 어서 빠져나가려고 안달이고
나는 어서 내보내지 않으려고 안달이었다
바다에서 우리집까지 기력을 다해 걸어온 적이 있었다
호떡집 앞을 지나쳤고 한 스무 개쯤의 버스정류소를 그냥 지나쳤다
돈하고 나하고 싸우는 동안 어느새 집앞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닐 때는
심심하지도 않았다 배고프지도 않았다
돈은 고작 몇천원, 몇백원일 때가 더 많았지만
호주머니는 불룩하고 통통하고 내 손은 따스했다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말을 걸 때도
건달들하고 시비가 붙었을 때도
호주머니에 손만 찔러넣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요즘 친구들 좀 히줄래기가 된 게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지 않아 그런 건 아닌지 몰라
알 수 없는 비밀들이 먼저 들어가 진을 쳐버려
그런 건 아닌지 몰라
호주머니가 다른 걸로 꽉 차는 바람에
오갈 데 없어진 손이 제 집을 찾지 못해
저렇게 허적허적 바깥만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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