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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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어청도시(詩)/박성우 2019. 6. 8. 09:04
1 군산항에서 나를 버리고 배에 올라야 세 시간 만에 만나주는 서해의 검푸른 고래등 사람들은 그 위에서 쌀을 안치고 그물을 손질한다 2 서녘 해가 마지막 고름 풀어 섬을 알몸으로 안아보고 치맛자락 길게 떠난다 검불로 조개를 구워먹던 악동들은 별을 달궈놓고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뜨거워진 구들장에 몸을 바꿔 눕다가 별이 미지근해지기 전에 출어를 서두르던 어청도 사내들, 흰수염고래 같은 파도를 끌고 입항하면 그제야 생각난 듯 등 돌려 자던 달이 마저 지워진다 이른 햇발에 걸려든 포말이 튀는 동안 어판장 아낙들은 걸쭉한 입담으로 목을 축인다 어젯밤 이불 속에서 피웠을 해당화 갯바람에 꺼내놓고 호들갑 떨다 보면 금세 손질되고 도막나는 하루가 가뿐하다 주낙에 낚시를 매는 주름살 깊은 노인 줄을 잡아당기는 양 손가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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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마흔시(詩)/박성우 2018. 9. 19. 11:57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 거울을 보고 있는 사내를 본다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마흔의 사내여, 너는 산다 죽을 둥 살 둥 살고 죽을 똥 살 똥 산다 죽을 똥을 싸면서도 죽자 사자 산다 죽자 사자 살아왔으니 살고 하루하루 죽은 목숨이라 여기고 산다 죽으나 사나 산다 죽기보다 싫어도 살고 죽을 고생을 해도 죽은 듯이 산다 풀이 죽어도 살고 기가 죽어도 살고 어깨가 축축 늘어져도 산다 성질머리도 자존심도 눌러 죽이고 산다 죽기 살기로 너를 짓눌러 죽이고 산다 수백 번도 넘게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고 늦은 밤 거울 앞에 앉은 사내여, 왜 웃느냐 너는 대체 왜 웃는 연습을 하느냐 (그림 : 송영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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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봄날은 간다시(詩)/박성우 2018. 4. 13. 09:08
깜장양말에 깜장구두다 아코디언으로 주름잡는 여섯 악사 모두 깜장중절모에 깜장염색약이다 느티나무 아래 평상은 평상시 노는 할머니들 차지고 행인들은 흘러간 옛 노래를 따라 느티나무 봄 그늘로 흘러들어온다 손자에게 목욕가방을 맡긴 할머니가 마이크 전해 받는다 잘 부탁합니다 허명순입니다 여섯 악사들은 봄날은 간다고 아코디언 주름을 접고 펴는데 잘 부탁합니다 허명순입니다, 에서 꿀을 먹은 할머니는 연분홍 치마를 놓치고 놓쳐 아코디언 반주만 봄날은 간다 중절모 사회자의 시작 손짓에 연분홍 치마 흩날리며 봄날은 가고 허명순 할머니는 열아홉 허명순이로 간다 열아홉 꽃망울은 복사꽃밭서 터지고 복사가지 흔들흔들 꽃잎은 흩날린다 어찌야 쓰까이 요로코롬 피어부러서, 노래 마친 할머니도 아코디언 연주하던 중절모들도 할머니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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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닭시(詩)/박성우 2018. 3. 30. 17:38
닭이 토란잎 그늘 맛을 알았다 토란대 사이를 누비고 다니다가 쬐는 햇볕 맛을 알았다 토란 밭고랑 옆에 돋기 시작한 시금치 맛을 알았다 하필 동리서 싸낙배기로 소문난 너디할매네 아래텃밭이다 뉘집 닭이 우리 밭을 다 조녀 놔 부렀디야 흐흠, 시금치 씨앗을 두 번이나 뿌렸는데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헛기침을 했다 닭을 닭장에 가둬 키우기는 싫고 그렇다고 닭이 농사를 다 조져 놓았다는 말을 들음서까지 닭을 마냥 놓아 키울 수도 없고 해서 아침저녁으로 궁리하던 차에 닭은 잘 크냐고 전화안부를 물어오는 부안살구나무 집 어머니께 암탉과 수탉을 보낸다 적적치 않게 말짓도 하면서 어머니 말동무나 하라고 닭을 보낸다 일어나라고 방문 앞에서 빡빡거리던 닭, 모이 주고 물 주고 밥벌이하러 나서면 내 꽁무니를 우르르 따라나서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