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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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다정다한 다정다감(多情多恨 多情多感)시(詩)/박성우 2017. 10. 23. 22:43
내 어머니도 ‘김정자’고 내 장모님도 ‘김정자’다 내 어머니는 정읍에서 정읍으로 시집간 김정자고 내 장모님은 봉화에서 봉화로 시집간 김정자다 둘 다 산골짝에서 나서 산골짝으로 시집간 김정자다 어버이날을 앞둔 연휴가 아가운 터에 봉화 김정자와 함께 정읍 김정자한테로 갔다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를 위해 간고등어가 든 도톰한 보자기를 챙겼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를 위해 시금시금 무친 장아찌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 내외에게 장판과 벽지를 새로 한 방을 내주었으나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 방으로 건너갔다 혼자 자는 김정자를 위해 혼자 자지 않아도 되는 김정자가 내 장인님을 독숙하게 하고 혼자 자는 김정자 방으로 건너가 나란히 누웠다 두 김정자는 잠들지도 않고 긴 밤을 이어갔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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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아름다운 무단침입시(詩)/박성우 2017. 9. 9. 16:45
별일은 아니었으나 별일이기도 했다 허리 삐끗해 입원했던 노모를 한 달여 만에 모시고 시골집 간다 동네 엄니들은 그간, 시골집 마당 텃밭에 콩을 심어 키워두었다 아무나 무단으로 대문 밀고 들어와 누구는 콩을 심고 가고 누구는 풀을 매고 갔다 누구는 형과 내가 대충 뽑아 텃밭 옆 비닐하우스에 대강 넣어둔 육쪽마늘과 벌마늘을 엮어두고 갔다 어느 엄니는 노모가 애지중지하는 길 건너 참깨밭, 풀을 줄줄이 잡아 하얀 참깨꽃이 주렁주렁 매달리게 했다 하이고 얼매나 욕봤디야, 누가 더 욕봤는지 알 수 없으나 노모도 웃고 동네 엄니들도 웃는다 콩잎맹키로 흔들림서 깨꽃맹키로 피어난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동네 엄니들의 아름다운 무단침입이나 소상히 파악하여 오는 추석에는 꼭 어린 것과 아내 앞세우고 가 대문 밀치리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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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밥그릇시(詩)/박성우 2017. 7. 29. 21:20
쇳소리가 새벽부터 고막을 친다 귓바퀴를 굴려보니 뒤꼍 쪽이다 어머니가 코딱지만한 밭에 밥그릇을 엎어 박고 있다 해장부텀 뭣 허요? 뭣 허긴 뭣 허냐 꼬치 심을라고 비닐이 뚫제 고추 모종하려고 깔아놓은 멀칭비닐 위에 쇠밥그릇 뒤집어 올려놓고는 손벽돌로 내리치신다 칭칭칭, 비닐 뚫고 들어가 박힌 쇠밥그릇 빼내니 고추모 심을 구멍이 기막히다 똑같은 간격으로 뚫린 둥근 구멍들, 영락없는 밥그릇이다 풀밭에서 텃밭으로 변한 이랑들이 아흔두 개의 밥그릇을 내밀고 있다 밥그릇 나눠준 쇠밥그릇이 고랑에 누워 반짝 웃는다 따뜻한 밥을 담던 일 그만두고 비닐을 뚫는 쇠붙이로 변신한 그릇, 내년 오월이 오기 전에는 어머니께 물려받은 헌 칫솔을 문 채 수돗가에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이다 검은 양귀비표 염색약을 출렁거리는 날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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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돌을 헐어 돌을시(詩)/박성우 2017. 3. 3. 14:57
십여 년 동안 쌓은 돌탑을 헐어낸다 마당 귀퉁이에 달팽이처럼 둥글게 감아두었던 돌을 빙 돌아가며 풀어내 계곡 쪽, 집 가장자리로 길게 당겨간다 허물어낸 돌을 길게 늘어트려 축대 겸 돌담으로 다시 차곡차곡 높인다 골짝 물소리는 쉬이 돌돌 넘어오고 골짝 물은 어지간하면 못 넘어오게 큰 돌은 양 바깥으로 괴어 올리고 자잘한 돌은 안쪽에 촘촘 채워 넣는다 혹여 큰 비 칠 때 내려올지 모를 큰 물이 부득불, 우리 집에 들렀다 가야겠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 하면 그러지 말고 자네 갈 길 가시게나, 등 토닥여 돌려보낼 만큼 돌을 얹는다 어쩐지 허전하고 서운키는 하더라도 정 없이 아주 매정해 보이지는 않게 돌탑 허물어, 큰 돌은 불끈 안아 나르고 자잘한 돌은 대야에 담아 옮겨 쟁인다 이 돌들은 대체로 돌밭을 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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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오이를 씹다가시(詩)/박성우 2016. 8. 10. 17:05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 집에 첨으로 놀러 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제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십오리 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 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테기에다 거시기를 해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 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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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별말 없이시(詩)/박성우 2016. 5. 30. 19:54
윗집 할매네 밭가에 우거진 가시덤불을 일없이 쳐드렸다 그러고 나서 두어 날 집을 비웠는데 텃밭 상추며 배추 잎이 누렇게 타들어간다 일절 비료도 안하고 묵힌 거름으로만 키워 먹는 풋것인지라 내 맘도 여간 타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요소를 쪼깐 허쳤는디 너무 허쳤는가? 아깐디, 뭔 비료를 다 주셨으라 윗집 할매는 고맙다는 표시로 별말 없이, 내 텃밭에 요소비료를 넘치게 뿌려주셨던 것이어서 나도 별말 없이 콩기름 한 통 사다가 저녁 마루에 두고 왔다 내 호박넝쿨이며 오이넝쿨이 윗집 할매네 부추밭으로만 기어들어가 여름 가을 내내 속도 없이 퍼질러댔지만 윗집 할매는 별말 없이, 비울 때가 더 많은 내 집을 일없이 봐주신다 (그림 : 채기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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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봄소풍시(詩)/박성우 2016. 4. 21. 19:30
봄비가 그쳤구요 햇발이 발목 젖지 않게 살금살금 벚꽃길을 거니는 아침입니다 더러는 꽃잎 베어문 햇살이 나무늘보마냥 가지에 발가락을 감고 있구요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드러낸 버드나무가 푸릇푸릇한 생머리를 바람에 말리고 있습니다 손거울로 힐끗힐끗 버드나무 엉덩이를 훔쳐보는 저수지 나도 합세해 집적거리는데 얄미웠을까요얄미웠겠지요 힘껏 돌팔매질하는 그녀 손끝을 따라 봄이 튑니다 힘껏 돌팔매질 하는 그녀 신나서 폴짝거릴 때마다 입가에서 배추흰나비떼 날아오릅니다 나는 나를 잠시 버리기로 합니다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