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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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보리앵두 먹는 법시(詩)/이정록 2016. 5. 14. 18:01
앵두를 오래 먹는 법은 따먹지 않는 거다 한 주먹 우물거려도 앵두씨나 가득할 것이다 싸돌아다니는 닭들 목구멍이나 막히게 할 것을 툇마루에 그림자 하나 앉혀놓고 눈으로 먹는 거다 보리알만해진 눈곱 곁에 앵두알 눈동자를 짝지우는 거다 눈동자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받아먹는 거다 앵두 뺨을 훔치는 소만 망종의 달빛까지 핥아먹는 거다 앵두 뺨과 앵두 이파리의 솜털이 내 귓불에도 돋아나게 하는 거다 그리하여 달빛 앵두인 양 날 훔쳐보는 사람 하나 갖는 거다 나 몰라라 슬그머니 앵두 이파리 뒤쪽에 숨어 혼자 날아온 새처럼 깃이나 다듬는 거다 처음 만나는 눈길인 양 쌍꺼풀만 깜작이는 거다 돌아앉아 앵두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나직이 우는 거다 (그림 : 이정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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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옆걸음시(詩)/이정록 2016. 3. 17. 21:20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이파리 한 잎 한 잎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 올 한 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후두둑후두둑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 올린다. (그림 : 장미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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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저 수컷을 매우 쳐라시(詩)/이정록 2016. 3. 17. 20:57
어물전이며 싸전, 골목골목 좌판을 펼쳐놓고있는 사람들, 십중팔구 여자다. 여자라고 부르기에 뭐한 여자다. 서로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심심찮게 이 여편네 저 여편네 악다구니를 끼얹는, 세 바퀴 반을 돌린 털목도리들이다. 생선 비늘 덕지덕지한 스폰지 파카들이다. 좌판이 키워왔는지 궁둥이를 중심으로 온몸이 뭉쳐져 있다 저 자리들을 모두 수컷들로 바꿔놓고 싶다. 마늘전 김봉길 씨와 옹기전 심정구 씨만 빼고, 썬그라스와 방수 시계를 파는 서부사나이만 나두고, 종일 내기 윷 노는 담뱃진들과 주정이 천직인 저 가래덩이들을 검정 비닐봉지에 한 열흘 집어넣었다가 좌판에 꿇어앉히고 싶다. 나오자마자 파주옥이나 당진집으로 달려갈 저 수컷들을 한 장 토막이라도 돼지쓸개처럼 묶어 말리고 싶다. 선거 철에만 막걸리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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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느슨해진다는 것시(詩)/이정록 2015. 10. 1. 23:32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뒷간에 기대 놓았던 대빗자루를 타고 박 덩굴이 올라갔데. 병이라는 거, 몸 안에서 하늘 쪽으로 저렇듯 덩굴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데. 마루기둥에 기대어 박꽃의 시든 입술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추녀 밑으로 거미줄이 보이는 게야. 링거처럼 빗방울 떨어지는 거미줄을 보고 있자니, 병을 다스린다는 거, 저 거미줄처럼 느슨해져야 하는구나.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거미처럼 때로는 푹 쉬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데. 달포 가까이 제 할 일 놓고 있는 빗자루를, 그래 너 잘 만났다 싶어 부둥켜안은 박 덩굴처럼, 내 몸에도 새로이 핏줄이 돌지 않겠나. 문병하는 박꽃의 작은 잎술을 바라보다가, 나 깊은 잠에 들었었네 그려. 비가 오니 마누라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먼.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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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사랑시(詩)/이정록 2015. 7. 16. 15:39
운동장 한가운데다가 물동이를 엎으면 철봉대 옆 볼품없는 나무 쪽으로 물길이 나는 거여 폭우 때 진즉 바닥이 쓸려나갔던 거지. 생선장수도 한마리만 사는 사람한테는 값도 헐하게 받고 큰놈으로 챙겨주는 거여. 서너 마리 흥정하는 이한테는 잔챙이도 섞어 팔어. 오죽 복잡한 속사정이면 이십 리 자갈길에 고등어 한 마리만 들고 가겄나? 그렇다고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며 한 마리씩 사는 놈은 마음주머니까지 가난한 좀팽이인 거지. 가난하다는 건 비탈이 심하다는 거다. 마음 씀씀이 좋은 생선장수든 마른 땅 적시는 물길이든, 뿌리가 드러난 쪽으로 정이 쏠리는 게 순리고 이치여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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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왜가리시(詩)/이정록 2015. 7. 16. 15:38
저수지 비탈 둑에서 뛰어다니던 왜가리 때문에 엄청 웃은 적 있지? 메뚜기 잡아다 새끼 주랴 제 헛헛한 허구리 채우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술 취한 막춤을 보며 박장대소했지. 부리나케 일어나서는, 밀친 놈 없나? 비웃는 놈 없나? 두리번거리던 꼬락서니에, '술 좀 줄여요. 왜가리 꼴로 훅 가는 수가 있어요.' 내게 쏠리던 눈초리가 떠오르는구나. 왜가리도 가을 지나 겨울 오면 차가운 물에 발 담그고 물고기를 기다리지. 사내란 저런 구석이 있어야 해. 시린 발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지느러미가 전해주는 미세한 떨림을 읽는거지. 눈은 시린 구름 너머에 던져놓고 의젓한 품새로 뒷짐 지고 말이여. 물고기가 가까이 다가오면 단 한 번 고개 숙이고는 다시 먼 하늘이나 바라보지. 물속 하늘은 가짜라서 진짜 하늘을 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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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사그랑주머니시(詩)/이정록 2015. 7. 4. 12:23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딱뜨린 새싹이 기죽을까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니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사그랑주머니 : 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남은 물건을 이르는 말.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