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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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가슴 우물 (어머니 학교 48)시(詩)/이정록 2018. 5. 22. 19:47
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어미가 이런저런 참견만 느는구나. 늙을수록 고양이 똥구멍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한숨을 말끔하게 내몰질 못해서 그려. 뒤주에서 인심 나는 법인데 가슴팍에다 근심곳간 들인 지 오래다 보니 사람한테나 허공한테나 걱정거리만 내뱉게 되여. 바닥까지 두레박을 내리지 못하니께 가슴 밑바닥에 어둠만 출렁거리는 거지. 샘을 덮은 우덜거지를 열고 들여다봐라. 하늘 넓은 거, 그게 다 먹구름 쌓였던 자리다. 어미 가슴 우물이야, 말해 뭣 하겄어. 대숲처럼 바람 소리만 스산해야.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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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버섯 (어머니학교 23)시(詩)/이정록 2018. 5. 22. 19:34
뽕나무 버드나무 미루나무 밑동에 지푸라기 덮여 있으면 뽕나무버섯 버드나무버섯 미루나무버섯이 자라고 있는 겨 임자가 있다는 뜻이지 그럼 아무도 안 건드려 별과 달은 바라보는 사람 거지만 버섯은 부지런한 사람 몫이여 우리 집 텃밭두둑의 감나무 뽕나무 미루나무엔 내가 사철 지푸라기를 덮어놔 니들이 버섯을 좀 좋아하냐 엊그제는 초롱산의 모든 소나무 밑에 외양간 마냥 지푸라기를 깔아놓으면 어떨까? 우스운 생각을 다 했다 그날 밤 꿈에 송이버섯이 죽순마냥 그득그득 솟아오르더구나 (그림 : 서인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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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품(아버지학교 4)시(詩)/이정록 2018. 5. 21. 16:53
아궁이 품 넓히는 것은 식은 재여. 추운 강아지며 괭이 뛰쳐 나오는 새벽 아궁이, 고운 재 때문이란 말이다. 한아름 장작 때문도, 불길 끌어당기는 열 길 굴뚝 때문도 아녀. 고무래에 아궁이 바닥이 조금씩 쓸려나오기 때문이여. 땡볕에 소나무장작 쟁여 물고 불뚝거리지 마라. 가슴은 식어야 넓어지는겨. 사내 품은 결국 비 맞은 재여. 마른 깻단, 젖은 짚불이라도 잘 다독이다 보면 너른 가슴이 되는겨. 아비는 희나리 악다문 채 화톳불이 되겄지만 말이여 희나리 : 채 마르지 않은 장작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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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기도시(詩)/이정록 2017. 12. 27. 21:44
한 겨울 연못 연밥을 본다 그을린 가마솥 본다 저게 연의 가슴이구나 눈보라가 밥물을 잡자 살얼음이 가늠한다 낱알마다 다시 작은 솥단지가 하나씩이다 연잎과 연꽃이 우러러 받든 하늘 그 하늘의 휘파람을 겨우내 끊이면 봄이 온다 진흙공책에다 고개를 꺾는복학의 계절이다 이곳저곳에 밑줄 긋지 말자 꺾인 연밥의 고개를 세우고 상처를 쓰다듬는다 이렇듯 밑줄은 단 한 번만 긋는 것이다 끝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마침표부터 찍는다 기도는 그 마침표에서 싹을 꺼내는 것 꽃과 밥은 언제나 무릎에 주시었나니 두 무릎에 연꽃이 필 때까지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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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울컥이라는 짐승시(詩)/이정록 2017. 12. 12. 13:20
언제 들어왔나, 내 몸에 바닥뿐인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질하는 짐승. 우리 안에선 한 놈이었는데 두 배 세 배 커지며 줄줄이 솟구쳐 나오지. 아홉 마리가 나오면 아흔 아홉 마리로 늘어나는 이 울컥이라는 짐승, 하지만 뛰쳐나오자마자 징검돌로 바뀌지. 그래, 그 돌덩어리를 딛고 수십 년 뒤로 돌아갈 수도 있지. 그러나,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순 없어. 한 치 눈앞을 눈물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이놈의 낭패(狼狽). 맞아!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지. 굽이치고 깊어지는 것만이 흙탕물의 운명이라, 첫 번 째 징검돌에 발도 못 얹은 나에게 다시 펄펄 끓는 울화통을 들이미는 당신. 숫된 부끄러움을 가리웠던 내 꼬리뼈 어디쯤 이슬도 말라버린 강줄기를 치고 올라와 기어코 나를 구유 삼은 당신. 목젖 안으로 부젓가락을 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