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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울컥이라는 짐승시(詩)/이정록 2017. 12. 12. 13:20
언제 들어왔나, 내 몸에
바닥뿐인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질하는 짐승.
우리 안에선 한 놈이었는데
두 배 세 배 커지며 줄줄이 솟구쳐 나오지.
아홉 마리가 나오면 아흔 아홉 마리로 늘어나는
이 울컥이라는 짐승, 하지만
뛰쳐나오자마자 징검돌로 바뀌지.
그래, 그 돌덩어리를 딛고
수십 년 뒤로 돌아갈 수도 있지.
그러나,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순 없어.
한 치 눈앞을 눈물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이놈의 낭패(狼狽). 맞아!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지.
굽이치고 깊어지는 것만이 흙탕물의 운명이라,
첫 번 째 징검돌에 발도 못 얹은 나에게
다시 펄펄 끓는 울화통을 들이미는 당신.
숫된 부끄러움을 가리웠던 내 꼬리뼈 어디쯤
이슬도 말라버린 강줄기를 치고 올라와
기어코 나를 구유 삼은 당신.
목젖 안으로 부젓가락을 쑤셔 넣고
너라는 짐승이 죽으면 내가 살겠지,
울컥거리는 내 사랑의 숨통이여.
등돌려 아득히, 함께 돌아갈 수 있겠는지.
눈길만으로도 얼굴을 가리던 손, 그 손가락
사이로 새나오던 가는 숨결로.
덩굴이라면, 몸 안에
덩굴손이 있는지도 모르던 떡잎 시절로.
참담(慘憺)이라면,설렘도 무섭던 젖 몽우리 시절로.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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