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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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전망시(詩)/이정록 2017. 1. 19. 14:05
새들이 이제 사람도 팡개질도 무서워 안 해, 둥지가 자꾸 낮아지더구나. 먹을 게 지천인데 누가 새 잡겄냐? 허수아비 대신 마네킹을 세놔도 허사여. 밭두둑에 수건 벗어놨는데 까치가 쪼아대더구나. 어미까치지 싶어 그냥 놔두고 왔다. 낮은 층에 살면 밖에서 들여다본다고 싫어하던데 사람은 사람에게 비춰보며 살아야 해. 들여다보면 좀 어떠냐? 제 집에서 뭔 나쁜 짓을 그리 많이 한다고. 로열층이 어떻고 경치가 어떻고 으스대지만 전망도 한두 번이면 텔레비젼만도 못한 거여. 사람만큼 좋은 전망이 어디 있겄냐? 새는 눈이 없어서 낮은 곳에 둥지를 틀겄냐? 진짜 전망은 둥지에서 내다보는 게 아니고 있는 힘 다해, 날개 쳐 올라가서 보는 거여.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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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실패시(詩)/이정록 2017. 1. 19. 13:58
실타래 뭉치하고 백옥 실패 하나씩 갖고 태어나지. 그 실마릴 놓치지 않으려고 빈주먹 옹송그리고 탯줄 벌겋게 우는 겨. 엉키고 꼬이는 실마릴 요모조모 풀다보면 그 끝자락에 무슨 값나가는 옥패가 나올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실마리 푸는 재미지. 뭔 횡재하려고 욕심부리면 안 되는 겨. 뭔가 나오겄지 언젠간 나오겄지 하고 견디는 거여.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중 실속 있는 겨.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 번 더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 겨.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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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금강 하구시(詩)/이정록 2017. 1. 13. 15:08
살다가, 정말이지 몸이 내 몸 같지 않을 땐 금강 하구에 가거라. 요 모양으로 싱겁게 살았구나, 갯물 들이켜는 강을 보아라. 이리 짜게만 출렁댔구나, 맹물 들이켜는 바다 보아라. 그래도,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을 땐 금강 하구에 가서 절 올려라.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고, 고개 숙여 들끓는 속마음 들여다보아라. 백팔 배, 귀 기울여 애끓는 곡절 들어보아라. 살다가, 정말이지 오갈 데 없는 마음일 땐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강물 보아라. 겨릅대 같은 갈매기 다리만 스쳐도, 바위너설 조개껍데기만 만나도 칭얼대는, 금강 하구 바다 보아라. (그림 : 김기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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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아버지의 일기시(詩)/이정록 2016. 12. 31. 15:05
귓바퀴 커지는 한겨울 새벽이다. 어제는 냇가 너설에 가서 바위 두 개를 들어냈다. 보 아래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우렁우렁 아름답다. 젖은 바지에 고드름이 매달려 서걱거린다. 그제는 커다란 워낭을 어미 소에게 달아주었다. 저도 듣기 좋은지 목을 자꾸만 흔들었다. 달포 전 혼자 사시던 기와집할머니가 돌아가시어 오늘은 추녀 밑에 쌓여 있던 오 년 묵은 장작을 옮겨왔다. 타닥타닥, 방고래가 제 뼈마디로 장단을 먹였다. 새벽 시냇물 소리, 워낭 소리, 장작 타는 소리 이것이 호강에 겨운 내 귀의 겨울나기이다. 귓속 우물에 살얼음 잡히는 한겨울 새벽이다. (그림 : 오수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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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면도기시(詩)/이정록 2016. 11. 19. 12:07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수염이 검어졌습니다. 양날면도기가 차갑게 턱 선을 내리긋고 지나갔습니다. 살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손쉬웠습니다. 한 면은 거칠었고 한 면은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날 선 쪽으로 삭삭, 두어 번 베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만 잘라 엇갈아 끼우셨습니다. 아버지는 무딘 쪽만 쓰셨습니다. 면도기를 함께 쓰다니, 다 컸구나. 기념으로 소주도 몇 잔 받았습니다. 잘 드는 쪽이 네 거다.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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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그늘 선물시(詩)/이정록 2016. 6. 19. 01:22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 왼손잡이가 이 밭 저 밭 코뚜레 잡아채도 소 콧구멍은 오른쪽으로 삐뚤어지지 않는다. 오른손잡이가 이 장바닥 저 장바닥 고삐 몰아쳐도 화등잔만한 눈알이 왼편으로 뒤집히지 않는다. 워낭 소리도 코쭝배기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도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는 법이여. 낭창낭창 코뚜레만 파이다 동강나는 거여.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장하겄냐? (그림 : 장정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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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학생부군신위시(詩)/이정록 2016. 6. 19. 01:20
가축하고 빗대는 건 얼토당토않다만 외양간 송아지가 아비찾든? 열두 마리 돼지 새끼들 가운데 아버지 찾아달라고 식음 전폐한 놈 있든? 아버지라면 꼴도 보기 싫다고, 니가 작대기로 장독 깨부쉈을 때가 열여섯 살 때다. 우리 집 묵은 장맛이 그때 대가 끊겼다. 늦잠 자는 새끼들 군불이나 지펴주고 대처로 나갈 즈음 대문이나 열어주는 거야. 아비는 다 쓸쓸한 거다. 공부 못해서 외국 안 나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애들 공부 못하는 것도 복이다. 새끼들 우등생이라고 으스대고 살았다만 무녀이 한 놈만 있었어도 어미 혼자 농사짓겄냐? 허수아비도 짝으로 서 있는 판에. (그림 : 남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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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기차표를 끊으며시(詩)/이정록 2016. 5. 24. 17:48
장항선에는 광천 역과 천안 역이 있는데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고요 천안에는 신부동이 있어요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는 지퍼의 손잡이처럼 그들 사이에 열차가 오르내리는데요 이들 둘의 사랑을 묶고 있는 장항선은 신부의 옷고름이자 신랑의 허리띠인 셈이지요 그런데 천안역은 이 땅 어디로든 풀어질 수 있구요 광천역은 오로지 신부동의 옷고름만 바라볼 뿐이지요 안타까운 신랑의 마음저림으로 광천 오서산의 이마가 백발의 억새 밭이 되고요 토굴 새우젓이 끄느름하게 곰삭는 것이지요 다른 역들은 잠깐만에 지나치지만, 천안역에서는 한참을 뜸들이며 우동국물까지 들이켜는 기다림을 신부가 알까요 호두과자처럼 작아지는 신랑의 거시기를 말이에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구요 천안에는 신부동이 있지요 그 사이에는요 신혼여행지로 알맞은 온천이 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