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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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파리시(詩)/이정록 2015. 6. 18. 01:42
충청남도 광천장(場)에서 출발하는 천북행 시내버스 운전사는 버스 안에 파리가 많아 골치다. 경로우대권 한 명 탈 때마다 등짝에 무임승차로 댓 마리씩 올라타기 때문이다. 운전사가 파리채를 휘두르자 노인들이 말한다. "그냥 놔두시게 기사 양반. 그놈들도 광천장에 왔다 가는 겨." 운전사가 대꾸한다. "다들 데리고 타셨다가 슬그머니 떼놓구 내리시니 죽겄슈. 저번 장날 것두 다 못 잡었슈. 잘 보면 집이 것두 있을뀨. 낯익은 놈 있으면 인사들이나 나눠유." "예끼 이 사람, 보니께 자네 등허리가 파리들한테는 아랫목이구먼. 우리야 손님들인디 자네 식솔들을 면면 알 수 있간디." (그림 : 고재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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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아버지의 욕시(詩)/이정록 2015. 6. 17. 11:59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 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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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살찌는 집시(詩)/이정록 2015. 6. 12. 21:23
슬픔은 살이 된다 신랑을 잃고 그는 울면서 찬밥을 먹는다. 손님이 적은 날은 버릴 수 없어서, 그렇지 않은 날은 남편 몫으로 퍼놓은 밥을 먹는다. 한번은 자신의 입맛으로, 새참은 남편의 식성으로 눈물 떨군다. 그가 살집에 갇힌 까닭도 그리움이고, 그가 풀려나올 수 있는 방법도 사랑이다. 뚱뚱한 세 딸 모두 엄마의 체질을 투덜거리지만 아버지가 보고플 때 마다 그들도 밥을 먹는다. 사람들은 그 집을 살찌는 집이라 부르며 간혹 그의 살집에 갇히면 좋겠다 큰소리친다. 하지만 옛사랑은 너무 뚱뚱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살찌는 집에 가면 슬픔도 비벼 먹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살이 되는 눈물이 든든해진다. 찬밥 가득한 그의 몸은 보온밥통이다. 눈물 젖은 손으로는 플러그를 뺄 수가 없다. (그림 : 김경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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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홍어시(詩)/이정록 2015. 6. 6. 11:50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 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 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이십팔 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 얼음막걸리를 젓는다 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 우리 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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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마늘밭을 지나다시(詩)/이정록 2015. 6. 5. 01:20
마늘종에는 마늘종 송아리라는 작은 마늘통이 매달린다 위아래에, 마늘은 왜 따로따로 씨통을 만들까 땅 속 굵은 밑알과 땅 위 송아리 사이에 질긴 끈, 마늘종이 있다 살아 눈총맞다, 죽어 된장독에 처박히는 괴로운 종 햇살 쪽, 꼬리 긴 마늘종 송아리를 뽑아내야 땅 밑 육쪽마늘이 실해진다 한치 어둠도 괴로워 지상으로 퍼올렸던 젊은 날이 시들며 아랫도리 알싸해진다 하지만, 그 마늘종 송아리를 씨앗으로 묻으면 쪽 없는 한 통 되마늘을 만날 수 있다 지하로만 내려갈 수 없었던 마늘종 송아리의 나날들이, 마늘밭에 가득하다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