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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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씨앗 파는 여자시(詩)/이정록 2015. 6. 1. 23:50
두어 평 남짓한 아리랑 종묘사 푸짐한 그가 맞춤으로 앉아 있다 (쭉정이는 한 톨도 읎어유) 몸집으로 가을을 보여준다 신문지 조각에 씨앗을 접는, 저 두꺼비 손을 거쳐 열무가 되고 육 쪽 마늘이 터지며 김치가 버무려 진다 (속 안 썩이는 자식이 어디 있나유 그래두 그놈들 죄다 새끼 낳구 낭중엔 눈물이 뭔지도 알더래니께유) 그의 품을 지나 들판이 열리고 겨울이 풀림을 근방 비둘기며 꿩이 다 안다 (차갑게 가만 들여다보면 때깔이며 모냥이 같은 게 읎지유 그러구 흠 읎는 씨앗 읎구유 그런디 이놈들, 씨앗 틔우고 한 가지 맴으로 골똘해지면 원하는 색깔루다 기차게 남실거리지유 말 더 안 혀두 알지유) (그림 : 장현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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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구부러진다는 것시(詩)/이정록 2015. 2. 11. 00:00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치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그림 : 성하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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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사내 가슴시(詩)/이정록 2015. 1. 5. 10:59
아들아, 저 백만 평 예당저수지 얼음판 좀 봐라. 참 판판하지? 근데 말이다. 저 용갈이 얼음장을 쩍 갈라서 뒤집어보면, 술지게미에 취한 황소가 삐뚤빼뚤 갈아엎은 비탈밭처럼 우둘투둘하니 곡절이 많다. 그게 사내 가슴이란 거다. 울뚝불뚝한 게 나쁜 것이 아녀,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그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출렁대니까 숨 쉬기 수월하고 물결가락 좋고, 겨우내 얼마나 든든하겄냐? 아비가 부르르 성질부리는 거, 그게 다 엄니나 니들 숨 쉬라고 그러는 겨. 장작불도 불길 한번 솟구칠 때마다 몸이 터지지, 쩌렁쩌렁 소리 한번 질러봐라, 너도 백만 평 사내 아니냐? 용갈이 :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 (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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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희망의 거처시(詩)/이정록 2014. 11. 20. 15:22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딛는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허방으로 내딛는 저 곁뿌리처럼 마디마다 맨발의 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목 울대까지 울컥울컥 부젓가락 같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옥수수밭 두둑의 저 버드나무는, 또한 제 흠집에서 뿌리를 내려 제 흠집에 박는다 상처의 지붕에서 상처의 주춧돌로 스스로 기둥을 세운다 생이란, 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 꺼내는 것이라고 버드나무와 옥수수 푸른 이파리 눈을 맞춘다. (그림 : 장현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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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비 그친 뒤시(詩)/이정록 2014. 10. 30. 02:01
소나기가 안마당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가 대문 쪽으로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을 다듬듯 바닥에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를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치자 울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들이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를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내기 중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 몸에 초록 침을 맞는 무논의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맞는 자리로 구름 몇이 다가온다 개구리의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그림 : 김주형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