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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그렇고 그려시(詩)/이정록 2020. 7. 4. 15:32
육묘 판에 씨앗을 심고 잎이 나오길 기다려 봐. 떡잎이 가리키는 방향이 다 다르지. 그런데 이파리
무성해지고 키가 자라면 다 거기서 거기여. 꽃도 두엇일 때는 동서남북 고개 수그린 놈 쳐든 놈 제각
각이지만 무더기로 피면 그렇고 그려. 꼬투리도 열매도 당연히 모양이며 빛깔이 다 다르지. 우리네
삶도 그렇고 그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하나둘일 때는 나만 부실하고 응달 얼음판이고 억울하지만
살다 보면 다들 걱정거리가 꾸러미로 두릅으로 바지게 짐짝으로 거기서 거기여. 굶어 죽은 놈보다 많
이 먹어서 병 걸리는 놈이 많다잖여. 올챙이 배처럼 창자가 복잡해도 똥구멍은 단순한 거여. 추워지면
죄다 땅속으로 겨울잠 자러 가는 거여. 슬픔도 괴로움도 다 무더기로 피는 꽃이여. 우리는 거름 치지
않은 꽃밭이고 참깨밭이여. 육묘 판 떠난 지가 언제여. 어우렁더우렁 꼴값하며 사는 거지. 굴러다니는
깡통도 다 개성적으로 빛나는 거여. 그나저나 막걸릿잔은 누가 이렇게 찌그려 놨대. 상처가 참 억울하
게 빛나는구먼.
(그림 : 박순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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