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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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바닷달팽이시(詩)/김수우 2017. 3. 3. 15:09
늙은 달팽이들이 버스에 오른다 매달린 집도 삐딱하니 늙었다 공동어시장 충무동 새벽시장 자갈치시장, 남항(南港)의 비린 터널을 통과하는 30번 버스 안 닳은 관절로 끌고 온 검은 봉지들 비릿한 아침을 물컥물컥 쏟아낸다 온몸 발이 되어 엉금엉금 경사진 하늘을 끌고 가는 비린 몸뻬들 수직을 잊은 지 오래 하지만 쥐라기의 사랑을 잊지 않았으니 비늘로 된 집을 지고 초록 신호등을 매일 기다리면서 시계집 정확당 철물점 대성건재 명성약국 차례로 지나면서 낯익은 지옥도 낯선 천국도 허공처럼 걸어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진 몸 한 번도 배우지 못한 하늘의 섭리를 국밥처럼 먹는 떠난 자식 잊힌 안부를 슬리퍼처럼 끄는 저 수학적 기울기 비릿한 점액질에 묻어나는 비밀, 투명하다 무수한 찰나를 미끄러져 우리 앞에 닿은 별똥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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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붉은 겨울시(詩)/김수우 2016. 12. 7. 13:13
거대한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포장마차 붉은 천막 국물과 소주잔을 놓고 앉은 영혼이 풀럭댑니다 자정 넘도록 혼불처럼 울렁이는 깊은 산마루들 오래된 사랑은 늘어난 빚돈만큼 아득하고 처음 꾸는 꿈은 수취인 불명만큼 서러워 문득문득 오래된 것들이 처음처럼 돌아오는 바람 속 거대한 등을 가진, 꽃잎만 한 아비들 하늘 끝에서도 잘 보이는 홍등입니다 먼 데서 바라볼수록 살아, 깜박이는 한 송이 산나리 아침이면 우주를 전파상처럼 운영하기 위해 온몸으로 울어야 할 유난히 붉은, 주전자 같은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그림 : 양경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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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천수천안시(詩)/김수우 2016. 6. 14. 12:11
공사장 뒷길 밥집 시멘트 담에 주욱 널린 면장갑 목련처럼 부풀며 봄 햇살을 매듭짓는다 거기, 까만 눈동자들 총총 고요로 돋아난다 손바닥마다 박힌 눈들, 깊다 쌀값, 병원비, 이잣돈 밤새 쇠기침에 시달리던 눈들,눈들 새벽일 나온 애비 에미들의 필사적인 눈들, 눈들 태풍처럼 부릅떠도 흰밥처럼 착하기만 한 관음의 눈들 그래도 그러지 마라 국밥이라도 말아먹고 가라 소주 한 잔 적시고 가라 살아 있는 동안은 무조건 고마운 기라 간섭하는 손들, 손들 슬픔의 늑골 사이로 천천히 발효되는 산제사 쪽문 함바집 한 채 천수천안 관음보살이다 (그림 : 이사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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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영도시(詩)/김수우 2016. 5. 4. 14:25
아버지는 평생 원양어선을 탔다 어머닌 새벽마다 늙은 북어를 끼고 용왕을 섬기러 나갔다 큰아버지도 허리병으로 눕기까지 그물을 끌었다 바다에 매달린 산동네 둘째 삼촌은 뱃머리의 녹을 벗기는 선박공장 노동자였다 셋째 넷째 삼촌 작업복에서도 늘 비린내와 쇳내가 났다 술렁술렁 가풀막을 오르던 파도 큰고모는 산복도로 끝에 있는 파란대문이 높다고 불평했다 막내고모는 그물공장에 다니며 뾰족구두를 샀다 골목우물은 검고 깊었다 동생은 도르래로 물날개를 건지며 놀았고 일곱 살 나는 그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배웠다 모든 눈빛을 낳고 사랑한, 헐렁한 바다만 껴입고 있던 할머닌 종종 후줄근한 파도에 풀을 먹여 팽팽하게 빨랫줄에 걸었다 봉래동, 신선동, 청학동, 영선동瀛仙洞 동네 이름 때문인지 너도나도 천천히 신선이 되어갔다 온몸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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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수련 지는 법시(詩)/김수우 2016. 5. 1. 17:05
단골찻집 주인이 바뀌었더군 꽃핀다고 들르고 꽃진다고 들렀더니 잊힐 뻔 잊힐 뻔한 안부마다 싱거운 눈웃음, 한톨 씨앗이더니 그 고운 씨앗 받아 다른 이와 나누기도 했더니 어느 결에 헤어지고 만 게야, 마음 비운 사이 수련 지는 법을 들었네 철없이 몇날 꽃비 뿌리거나 제 열정에 겨워 몸던지는 게 꽃지는 방식이거늘 수련은 잠잠히 물 속으로 돌아가지 소금쟁이가 딛은 고요를 돌아보는 어느 결에 송이째 물에 잠긴다네, 마음 비운 사이 고운 사람 내게 수련처럼 졌으니 나도 그에게 한 꽃자리일까 고운 사람 누구에겐가 수련으로 피어날 테니 물속줄기, 더 푸른 바람을 풀어내리라 물그림자 흔들릴 때마다 어느 결에 내 옷자락도 젖을 테지, 그, 마음 비운 사이 (그림 : 이명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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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엄마와 북어시(詩)/김수우 2016. 5. 1. 14:58
세수대야에 푸른 실타래와 엄마를 담고 북두칠성을 딛는 북어의 뒷모습은 희었다 하루치 양식처럼 꾸던 짧은 새벽꿈은 발꿈치에 끌리다가 용왕님 귀밑에서 눈을 부볐다 손수레이삿짐을 끌고 골목길 비집던 엄마, 남편 원양어선 타고나간 날 참빗질로 네 남매의 머릿니를 열심히 잡던, 양동이 이고 목청 세우던, 망치질 잘 하는 그악스러운 엄마를 안고 북어는 새벽마다 바다로 갔다 겨울바다를 한 대접 정화수로 길어올리던 손, 그 가슴지느러미 끝에서 엄마의 용왕들은 동백처럼 붉었던가 남편은 뭍으로 돌아와 무사히 늙고 아들은 새 집을 사고 딸은 서정시를 쓴다는데 이제 몸에서 먼 북소리가 나는 북어 뿔처럼 딱딱해진 눈물샘으로 젖멍울로 세상의 신(神)들을 안고가는 저문 하늘을 밀고가는 심해, 내가 길어야 할 깊은 미래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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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송도 아랫길시(詩)/김수우 2016. 5. 1. 14:54
꽃집과 전봇대와 은행나무가 비립니다 세탁소 한일반점 우체통, 천원어치 찐빵과 웃음과 약속에도 더께앉은, 낮달도 울컥 토해내는 비린내 손등에 비늘이 돋습니다 뒤뚝한 물살이 밀고오는 수심층으로 가라앉습니다 생의 톱날이 깊습니다 한 마리 정어리로 오르는 슬픈 물벼랑 우주의 끝을 딛고 발목 저린데 바닷새, 하얗게, 저만치, 지루합니다 선창을 돌고돌아 아랫길이 된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딸의 딸의 딸 굴절됩니다, 햇살은 공동어시장에서 수천 번 꺾이고 살아 흘러가는 길, 그 굴절의 우듬지마다 겨울눈 반짝여 멸치떼로 굽이치는 무릎들을 사랑하고 맙니다 억년 허공을 비우는 눈시울에 푸득, 무게를 싣는 영혼, 비릿한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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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파도의 방시(詩)/김수우 2016. 5. 1. 14:51
머리맡에 선고처럼 붙어 있는 사진 엄마와 동생들, 내가 유채꽃밭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서 아버진 삶을 집행했다 깊이 내리고 오래 끌고 높이 추어올리던 그물과 그물들, 종이배를 잘 접던 일곱 살 눈에도 따개비지붕 단칸방보다 벼랑지던 방 평생이었다 고깃길 따라 삐걱대던, 비린내와 기름내 질척한 유한의 방에서 아버진 무한의 방이 되었다 여섯 식구 하루에 수십 번씩 열고 닫는 기관실 복도 끝에 있던 그 바다의 방을 육지에 닿은 십 년내 지고 왔는지 스무 명 대가족사진 속 소복소복 핀 미소에서 어둑한 방 하나 흔들린다 칠순 아버지의 굽고 녹슨 방, 쓸고 닦고 꽃병을 놓아도 아직 비리다 아무리 행복한 사진을 걸어도 생이 얼마나 비리고 기름내 나는 방인지 겨우 눈치챈다 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연다 집행된 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