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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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금실은실시(詩)/김수우 2016. 4. 7. 01:14
1 열 살 때까지 바다가 보이는 산동네에 살았다. 산복도로에서 버스를 내리면 시퉁한 얼굴의 바다, 창을 열면 골목 굽이진 담 밖에서 눈을 흘겼다 때로 이빨을 보이며 웃기도 했다 저녁이면 큰배들마다 조명등과 작업등이 켜졌다 한밤의 바다에 수놓이는 금실은실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가난이 칡덩굴인줄 모르고 자랐다 그 섬세한 흔들림 때문에 하늘의 별들도 이쁘지 않았다 바다의 가슴속에는 흔들바람이 들어 있었다. 2 엄마의 바느질 꾸러미에는 담겨있던 서너 개의 금실은실 실꾸리. 살아가는 방법이었던 엄마의 꾸러미를 열면 참 오밀한 이야기들이 만져졌다 머리카락 같이 가늘고 긴 슬픔은 대바늘 끝에서 어울려 내 뜨개옷마다 반짝였다 슬픔이 뿌리인줄 모르고 공기돌을 놀았다 시간을 지워가며 희망을 뜨듯 그렇게 우리의 윗도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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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고등어시(詩)/김수우 2016. 3. 30. 00:48
온몸이 컴컴한 골목들로 빽빽합니다 지치지 않는 길과 창문과 얼굴이 서로 마주해 자작나무처럼 자란 저, 무늬들 샛길 하늘을 얽어놓은 전깃줄도 보입니다 알전구가 흔들리면 선반에 일년내 피어있던 프라스틱 패랭이꽃도 슬쩍 흔들립니다 팽팽하던 길, 구불구불 몸속으로 기어들 때 비로소 한 마리 고등어로 돌아 올 수 있음을 알았으니 애초 등푸른 생선으로 팔린 내가 다시 푸른 등짝으로 도착합니다 두고온 길들, 내버린 길들, 몸속에 가둔 벼랑이 뒤척이는데, 이천 원에 팔리는 한 마리 슬픔, 눈이 붉어옵니다 왁자한 파도들 익숙하고 낯설어 낮게 낮게 시장통 좌판에 물끄러미 누울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걸어야 할 바다, 매일 토막을 냅니다 (그림 : 박미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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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엉겅퀴꽃 아버지시(詩)/김수우 2016. 3. 30. 00:34
밤새워 소주를 마셔도 당신은 젖지 않는다 이미 세상의 빗물에 취해 버린 이마와 가슴, 봉창을 닮았다 아니 밤새 헤아려 놓은 희망으로 얼룩진 새벽 봉창이다 문지방엔 당신이 밟아 넘어뜨린 근심이 더께졌다 삼킨 울음은 뭉그러진 못대가리로 박혀 빛난다 벗은 영혼은 못쓰는 타자기처럼 뻑뻑하지만 글쇠 몇 개 언제나 굳건히 일어선다 그런 당신의 옹이에 나는 옷을 건다 무거운 코트를 제일 먼저 건다 진통제처럼 떠있는 새벽달을 먹고 당신은 기침을 쏟는다 기침마다 헐은 아침이 묻어나온다 헌 구두짝에 담긴 하루를 신고 당신이 걷는 길은 손등에서 쇠빛 혈관으로 툭툭 불거지는데 당신의 방 앞에서 매일 꽃피는 붉은 엉겅퀴 (그림 : 김정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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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빨래시(詩)/김수우 2016. 3. 29. 23:59
신선동 산복도로 골목 햇발 번진 담벼락에, 옥상 파란 물통 옆에 빨래들이 정직하게, 사람보다 더 곰살맞게 살아갑니다 바지는 사람의 무릎보다 기특하고 셔츠는 그 가슴보다 지극합니다 환상을 지우고 지린 풍경을 덜어내고 한 잎 기적조차 털어내고 제 속살 펼처내는 하루 기다릴줄 알고 흔들릴 줄 아는 빨래의 공식은 뺄셈, 쪽바람에도 빛나는 남루입니다 매일 빨아 입는 슬픔도, 자주 빨아 입지 못하는 절망도 무심하고, 절실하고, 겸허하여 늙을 대로 늙은 잡업복 무명 시편처럼 태연합니다, 슬몃 펄럭입니다 영혼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신선동 : 부산광역시 영도구 신선동 (그림 : 이시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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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풋잠을 걷고시(詩)/김수우 2014. 8. 30. 00:25
놀자놀자 불러내는 별들 때문에 이빨 나간 사발 같은 잠 집어던지고 대성으로 간다 안개및 가스등을 들고 배꼽고동을 잡으러 바다의 꿈속을 찾아간다 또 어느 놈을 만나고 있는지 바다는 꼬리자국만 남겨 놓고 보이지도 않아 못내 여위어 주름만 깊은 어머니 가슴 닮은 개펄에는 작은 고깃배 엎드려 잠이 들고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엄지 만한 새끼 게들이 눈 가렸다 떴다 놀고 있는데 대숲이 바람에 아파할 때마다 먼 사람들이 켠 등불은 별이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 총글총글한 눈짓들이 쓰라리다 너무 아프다 글썽글썽한 눈물들이 매웁다 뼈에 저리다 너도 나도 살아 있어 반짝여야 한다는 것 디딜방아 찧는 방아깨비의 푸른 속날갯짓 같아 생손앓이의 그리움도 별자리에서 굴러내린 이슬 탓이다. (그림 : 설종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