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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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자갈길시(詩)/김수우 2014. 8. 30. 00:14
자갈길을 걷는다. 자유란 저 자갈들처럼 온몸으로 바람과 햇살과 부딪치는 것. 깨어지고 닳아져 서로 닮아 가는 것. 그럼에도 부딪쳐야 할 더 많은 시간들이 앞에 놓여 있다. 모래 한 톨, 먼지 한 톨로 남을 때까지 견디면서 먼길을 꿈꾼다. 그런 거친 부딪침과 미세한 닿음이 모두 자유의 뿌리가 되리라. 자유는 '지금', '여기'를 걷는 길. 그 길에 우리의 미숙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들꽃이 핀다. 우리가 두고 온 수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다시 펼쳐져 있다. 추소리에서 방아실 가는 산골에서 만난 고무신. 언제, 누가 벗어 놓았을까. 삶이란 서로 닮아가는 길임을 말하는 듯하다. 농부가 걸어온 길만큼 농부를 닮았으리라. 꺼먹 고무신에 고인 하늘이 맑다.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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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자리이다시(詩)/김수우 2014. 8. 30. 00:11
어느 골목이든 늘 같은 풍경이다. 담벼락에 널린 빨래들과 모퉁이에 세워놓은 자전거, 삐뚤하게 달린 우편함, 깨진 화분 그리고 누군가 내놓은 망가진 의자들이 함께 낡아간다. 인간의 육신도 결국은 한 채 퇴락해가는 풍경이기 때문일까. 조금씩 기울어가는 모습이 산부추꽃에 내린 저녁햇살만큼이나 애잔하다. 봄이 오는 골목길에서 마주친 한 자리의 모습은 생애를 묵묵히 살아낸 선량한 사내를 떠올린다. 그도 고독과 자유를 선택했을까. 민달팽이를 닮은 슬픈 등을 본다. 비바람과 햇살에 바랜 자리의 적요. 그 희노애락의 시간만큼 적막한 이야기들이 편안하고 깊고 당당하다. 시간의 이끼가 푸르게 반짝인다. 낡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거는 늘 푸르다. 때문에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하며, 술잔을 들 때마다 고달펐던 그때가 좋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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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냉이꽃시(詩)/김수우 2014. 8. 29. 23:58
어떤 이들은 삶이 너무 무겁다고 고민하고, 어떤 이들은 가볍다고 서러워한다. 같은 분량의 햇살이나 빗방울이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처럼 힘들고, 다른 이에게는 홀씨처럼 가볍다. 무겁거나 가볍거나 무게를 느끼는 건 다행이다. 그건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무게에 무심하다면 그건 읽혀지지 않은 채 낡아 먼지 속에 갇힌 책뚜껑만큼 슬픈 일.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가. 견디고 싶은 멀미처럼, 우리는 창을 열고 먼 산을 바라본다. 그래서 사랑은 바라보기다. 희망도 그러하다. 그 잴 수 없는 무게를 우리는 매일 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외롭기만 하다. 그저 외로우면서도 맑은 꽃 한 송이 피워 본다. 버려진 쇳덩이 속에서 햇빛을 짤랑거리며 핀 냉이꽃. 우리의 삶도, 죽음도, 사랑도 꼭 저만큼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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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하늘이 보이는 쪽창시(詩)/김수우 2014. 8. 29. 23:55
내 유년시절은 좁다란 골목으로 이어져 있다. 막다른 것 같으면서도, 길은 삐뚤한 담벼락을 타고 다시 꺾여 꼬불꼬불 구비진다. 한 사람 빠듯이 지날 만한 골목길도 어디어디로 빠져나가면서 다른 길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일상들이 어둡고 막힌 삶이 아니라, 열린 것임을 절대 강조하듯 담벼락마다 작은 봉창들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봄볕이 시작되어도 겨우내 쌓인 눈이 녹지 않던 응달 모퉁이. 어느날 불현듯 민들레가 피어나고, 깨진 블록담 사이에 날아온 풀씨들이 파아랗게 싹을 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늘 허기가 돋던 그 골목길이 슬프지가 않았다. 골목이 꺾이는 곳에 가로등이 물기 묻은 희망처럼 서있었다. 우리들의 희망이 태양처럼 휘황하기보다 달빛 받은 작은 기도 같은 것임을 보여주듯. 때문에 나는 삶이란 어디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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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빨래집게시(詩)/김수우 2014. 8. 29. 23:51
겨울잔디 시린 발목 아랫목 이불 속으로 밀어넣듯 땅 밑으로 밑으로 오그리는데 바지랑대 치워버린 빨랫줄 빈 집게만이 쪼로록 참새새끼같이 떨고 있다 양말이며 청바지며 바람이 훔쳐 가겠다고 넘어올 때마다 '빼앗길 수 없어' 끝까지 악물던 입술 이젠 잿빛 산그림자만 물었구나 걷어진 빨래들과 그 욕심들은 서랍장 속에 개켜지고 흔들리는 건 가슴속 풀냄새 바람도 낯설은 듯 등 돌리는데 진종일 싸락눈에 시달린 그 입술이 시려워 자꾸 내 입술이 깨물어진다 옷장 밑에 숨겨 두었던 옛날들을 다시 널어야 할 것 같다 (그림 : 이수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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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산비탈길에서시(詩)/김수우 2014. 8. 29. 23:49
는개비 풋냄새에 밀려 우산을 접는다 5월의 산비탈 흔들림 없는 흔들림 말씀 없는 말씀 흰 나비처럼 쪼그리고 앉는다 더 잘 볼 수 있을까 풀씨 다 날린 잿빛 대궁과 푸른 입술로 잠투정하는 새순 사이 꽃거미가 친 부드러운 그물에는 안개들이 잡혀 있었다 달달 외웠지만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갈아 순간 화살로 꽂히는 그리움 거미줄에 이슬로 잡힌 나의 봄 어쩌지못해 온몸에 쥐가 나리고 마을을 찾아 더듬더듬 일어서는데 자꾸 재채기가 났다 가까이 새가 울고. (그림 : 신인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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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 포장마차의 봄시(詩)/김수우 2014. 8. 29. 23:47
꼼장어 한 마리 양념해 구워놓고 산다는 건 사랑한다는 거야! 석굴 하나 번개탄에 얹으면서 아, 나도 옛날엔 별을 줍고 살았지 요즈음은 뼈가 자라지 않아! 빈터 모퉁이바람 안으면서 살아가는 일은 두꺼워지는 일이야! 빈 소줏병 깨어지는 소리 둘러앉은 어깨마다 할 말이 많아 왁작왁작 자갈 같은 설움 사이에서 우린 점점 말이 없어지는데 머리 속에서 노오란 공이 굴러온다 눈앞이 갑자기 화안해지며 산수유 노오랗게 핀 고향의 하늘 걸어, 걸어서 들어온다 포장마차 속으로. (그림 : 이석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