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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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저녁 노을시(詩)/이상국 2018. 12. 16. 13:26
주먹만한 감자 찐 옥수수 오이 가지 강낭콩이랑 고추 된장 쇠비름 몇 단 함지박 채워 이고 어머니는 해수욕장 간다 울긋불긋한 차일 아래 허여멀건 살들이 미어터지는데 면서기 군서기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호루라기 분다 파래 미역 뜯으러 친정집 드나들 듯하던 십 리 길도 안 되는 내 집 앞바다인데 돈 주고 샀다며 벌거숭이 관리인이 함지박 걷어차고 터 잡은 장사꾼들이 눈을 부라린다 불볕 아래 쇠처럼 달아오른 모래밭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쫒겨다니다가 땀 전 어머니 얼굴에는 하얀 소금꽃 맺혔는데 빈 함지박 털어 이고 오는 저녁 하늘에 벌거벗은 놀이 폈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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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복골 사람들시(詩)/이상국 2018. 12. 16. 13:24
비 끝에 돼지 잡아 잔치하고 양구집도 갔다 트럭에 농짝이랑 TV, 늙은 어머니 싣고 떠나던 날 이장네는 텃밭에 마늘씨를 묻었다 차거운 흙 속에 눈물을 묻었다 볕도 예전 같지 않아 한 해 추위에도 많은 나무들이 세상을 뜨고 들판의 염소들은 수염을 흔들며 울었다 복골을 버린 차가 장거리 쪽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나눠 맡은 장독이나 멍석때기 들고 선뜻 흩어지지 못해 늦게까지 술잔 기울이는 구판장 바람벽에서 반이나 벗은 맥주회사 여자가 복골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여물 때가 되어도 어묵공장 막일 나가는 며느리는 돌아오지 않고 마늘쪽 같은 아이들이 구들에 불을 넣는다 날이 가물어서 푸섶 타는 연기 같은 어둠이 마을을 덮어오는 조선의 추억 같은 저녁 이장네 칠순 아버지가 소를 들여 매고 있다 세상이 언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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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옛 동네를 지나면 생각나는 부자유친의 저녁시(詩)/이상국 2018. 6. 26. 12:51
이 동네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아들과 나는 축구를 했다 어떤 날은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다 아들은 골잡이를 하고 나는 골키퍼를 했다 그 반대도 했다 아들은 쓸데없는 고함을 지르며 골을 넣고 나는 땀을 흘리며 막았지만 서로 조금씩 봐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부자유친 같은 것이기도 했다 교정의 히말라야 시다가 학교를 가리는 동안 그 애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늙은이가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시간이 하는 일이었고 어느 날 하늘에서 눈이 내리거나 봄가을이 하는 일과 같은 거였다 지금은 혹시 내가 사정해도 그 애는 나와 공놀이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 재미도 없겠지만 우리들의 유친(有親)도 예전 같지 않아서다 그러나 섭섭하지는 않다 나 대신 어느 동네 운동장에선가 제 아들과 저물도록 공놀이를 할 것이 때문이다 부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