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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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집은 아직 따뜻하다시(詩)/이상국 2015. 2. 5. 02:12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것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본다 어성천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법수치리 ,남대천의 상류로서 양양읍내를 거쳐 동해로 흘러든다 (그림 : 정태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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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시(詩)/이상국 2015. 2. 2. 00:48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끊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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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법수치시(詩)/이상국 2014. 11. 26. 12:13
법수치 웃당골에는 산만한 부처님이 사시고 밤마다 밤일하는 부처님 거기서 나오는 법수가 장장 구십여 리 물 안팎 것들을 먹이고 거두며 동해로 가는데요 때로 매봉산 느릅나무들이 제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몸을 내던지기도 하고 어떤 날 밤은 상원사 문수전이 중과 싸우고 나와 몇날며칠 울다 가기도 하는 그곳 가서 한 사날 죽어라고 물소리 들었습니다 마음에 씻어낼 슬픔이 있어 간 것도 아니요 물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나이도 아니지만 물소리가 왜 그렇게 환장하게 제 몸속으로 들어오던지요 나는 그 물로 밥해 먹고 똥누고 밑 닦고 뒤집어써보기도 하고 풍덩 빠져도 보며 온갖 지랄을 다 했는데 그래 봤자 그 모든 짓이 법수치에게는 물가의 물푸레나무 한 그루나 진배없었겠지요 내가 죽어 이 세상에 없어도 법수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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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동해 낙산시(詩)/이상국 2014. 11. 26. 12:07
파도 소리 들리는 솔숲에서 그이는 천 년도 넘게 나를 기다린다고 했으나 해지고 어두워지자 절도 중도 동해 속으로 사라지고 의상대에서 보아도 오봉(五峰)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네 세상은 빈 몸으로 갈 수 없는 곳이니 조개 목걸이나 하고 가라던 행상이었을까 한 사날 묵어 가라던 주청리 민박집 여자였을까 꿈엔 듯 생시엔 듯 서럽게 내가 나를 지나가는데 관음이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천 년이나 나를 기다리는 동해 낙산 오늘도 날이 저물고 아름다운 바다가 길을 막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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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미시령시(詩)/이상국 2014. 8. 31. 01:23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나도 더러 대처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그러나 바다가 섭섭해 할까 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속으로 서울 같은 건 복잡해서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도 더러 울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그 짐승 같은 슬픔을 누가 거두겠냐며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해는 네가 얼마나 심심하면 그러겠냐며 남모르게 곁을 주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바람이나 나무뿌리에 묻어둔 채 영을 넘고는 한다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