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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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저녁의 집시(詩)/이상국 2017. 12. 12. 12:29
해 떨어지면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먼 개울물 흐르는 소리 울타리 너머 밥 잦는 냄새 속으로 꼴짐 높게 진 사람들 두런두런 혼잣말하며 배가 장구통 같은 소 앞세우고 돌아오네 제 새끼 안 보인다고 아갈질 해대는 소울음 사이로 박쥐떼들 아무렇게나 날아간다 고등빼기 우리집에서는어여 와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어머니도 딱하다 나도 이젠 자식을 둘이나 두었는데 아직 내 이름을 알몸뚱이로 동네방네 불러대다니 하늘 뒤에서 별이 어둠을 씻고 나온다 키 큰 밤나무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어둠속에서 새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리고 변소 지붕 위의 박이 엉덩이처럼 희게 떠오른다 부엌문 여닫힐 때마다 불빛에 어리는 마당 식구들 어둠에 잠겨 찰랑거리는 마을에서 이파리들의 소곤거림 쇠똥 냄새 먼데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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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고독이 거기서시(詩)/이상국 2017. 5. 3. 23:36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카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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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남대천으로 가는 길 1시(詩)/이상국 2016. 8. 10. 17:55
물소리가 이집 저집 문을 닫아주며 가는데 텃밭에서 고구마가 붉게 여물고 물새들은 알을 품고 누웠다 연어처럼 등때기 푸른 아이들이 물가에 나와 엉덩짝에 풀물을 들이거나 물수제비를 띄우며 그립다고 떠드는 소리를 물소리가 얼른 들쳐업고 간다 집 떠나 오래 된 이들도 물소리 들으면 새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저녁 풀이파리 끝 이슬등마다 환하게 불이 켜지고 어디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들린다 남대천(南大川) : 강원도태백산맥(太白山脈) 동쪽사면에서 발원(發源)하여 강릉시를 지나 동해로 들러드는 하천 길이 51.3㎞. 강의 옛 이름은 성남천·남천이었으며 하류지역에 광제연이 있었다고 한다. 상류부의 산지에는 좁은 곡저평야가 띠 모양으로 발달했고 하류부의 해안지역에는 비교적 넓고 기름진 충적지가 발달 해 있다.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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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혜화역 4번 출구시(詩)/이상국 2016. 5. 31. 00:26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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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자두시(詩)/이상국 2016. 2. 13. 16:29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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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저녁의 노래시(詩)/이상국 2015. 8. 6. 19:38
나는 저녁이 좋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어스름을 앞세우고 어둠은 갯가의 조수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딸네집 갔다오는 친정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벌레와 새들은 그 속의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사람들도 뻣뻣하던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면 하늘에는 별이 뜨고 아이들이 공을 튀기며 돌아오는 골목길 어디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안다 나는 날마다 저녁을 기다린다 어둠속에서는 누구나 건달처럼 우쭐거리거나 쓸쓸함도 힘이 되므로 오늘도 나는 쓸데없이 거리의 불빛을 기웃거리다가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그림 : 박용섭화백)